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으로 벧엘의 선지자가 확신한 일은 무엇인가요?
그가 참선지자임과 벧엘을 향한 심판 예언이 성취될 것을 확신합니다.
벧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벧엘의 선지자가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자신의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 옆에 두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참선지자 옆에 묻혀 자신도 참선지자라는 명예를 얻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벧엘의 선지자는 당시 타락한 벧엘의 종교 지도자를 대표합니다. 그는 하나님 음성을 더는 듣지 못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참선지자의 목숨을 이용해 하나님 뜻을 확인한 것입니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을 나쁘게 이용하는 경우는 없나요?
요셉을 팔아 넘긴 것. 밧세바를 간음한 것, 사람이 탐욕, 욕망, 그리고 부정직한 수단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는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그 결과로 많은 비극과 재앙을 초래했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나는 성경 말씀을 이용한 적이 있다. 참 회개가 필요한 성도이다.
회개하고 또 회개한다. 나는 그저 하나님을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도구로 믿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을 뿐이지 오직 의로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즉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이용한 것이다. 내가 의롭고자 단지 하나님의 핑계를 대고 그리스도인의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고 나에게도 그렇고 나의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게 된다.
이것이 한 끝 차이인데 결국 내가 남한테 성경말씀을 강요하거나 타인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는 식의 정죄와 판단으로 흐르면 안되겠다.
어찌하면 성경 말씀을 한자라도 더 읽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고민이 되고 이것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을지 너무나도 고민이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한다. 직접 큰소리로, 그리고 깊게 묵상해야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은혜를 풍성히 주신 것일 뿐, 그 무엇도 나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한다.
신앙의 강제가 있어야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과연 그 뼈를 깍는 노력을 하나님께서는 언제 주실지? 답답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의 의로 행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피가 흐른다. 상처가 나고 관계가 멀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수평적 수직적 관계가 멀어진다.
그래서 너무 힘들다 사랑을 주면서도 어찌 이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진리를 전해야할지 너무나도 어렵다.
당장 우리 어머니, 누나 전도하는 것만 생각해도 너무 막막하다.
그래서 오직 기도 밖에 없는 것 같다.
오늘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기도한다. 꼭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죽음 후에, 여로보암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여로보암은 여전히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다. 말랐던 손이 은혜로 회복 되었음에도 하나님께 감사로 반응하지 않는다. 신앙은 반응, 리액션, 피드백, 태도, 삶의 태도이다. 여로보암은 멸망한다. 벧엘의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외치지 않았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인만하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선지자이다. 마음이 완고해 악을 버리지 않고, 심판 받을 죄임을 알고도 경고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하나님의 경고를 먼저 알게 되었다면, 내가 감당할 역할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경고는 불이 난 것이다. 민방위 교육에서 불나면
- 대피하고 주변에 알린다 불이야
- 119에 신고한다.
- 집에 있는 금송아지, 개 , 재산 버리고 도망가야한다.
하나님의 경고가 있으면 알려야한다.
- 이건 하나님의 경고에요,
- 그리고 교회가세요,
- 우상숭배 하지마세요.
이렇게 해야한다. 근데 나는 이 시대의 무능한 선지자가 아닐까?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내가 알고 있으나, 열방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어찌 이리도 못할지 모르겠다.
무능한 선지자는 내 자신의 모습이고 너무나도 뼈져리게 느껴진다.
거기다가 참 선지자도 불복종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고 치열하다.
어떻게하면 잘 순종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고민이 된다.
믿음의 선배님들 말씀은 안하시지만 어찌 그렇게 치열하게 믿으셨는지 나는 과연 남은 생 50년간 희년을 맞이 할 수 있을까?
50년 동안 매너리즘에 안빠지고 첫사랑을 잘 간직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을까?
혹여 지치지는 않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뎌져서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너무 많이 들어서 내 영안이 다시 닫히지는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이제는 너무 달아서 메추라기를 달라고 했던 만나가 지겹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꼬라지가 내 미래의 모습은 아닐까?
두렵고 너무 내 자신이 실망스럽지만 주님께서는 인자하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누가 뭐래도 나는 오직 예수님이에요 고백하자.
자백하고 내 자아를 포기한다. 엄중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여전히 끊지 못한 죄가 있는지 되돌아본다.
이웃에게 전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때 가감없이 담대히 전하게 하시고
때론 힘들고 위태로워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자책감의 마귀 물러나라! 사단마귀 물렀거라!
하나님 오직 성령충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명언
하나님을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악한 계획과 시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 윌리엄 매코널
영적 각성이 필요한 때
우리의 삶과 공동체, 사회와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 대신 이성주의, 합리주의를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꿔치기는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의 깊게 경계하고 분별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잘 모릅니다.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상업화, 형식적인 절차만 중시하는 의식화, 개인 영역에만 머무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일상과 동떨어진 고립화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며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종교 생활만 계속한다면 패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먼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삶을 운영해 온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조정이 필요합니다. 지엽적이고 임시적인 처방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진 공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제가, 저희 공동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소서.”**라고 눈물로 기도하며 근본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인본주의로 대처하며 인간의 생각, 인간의 프로그램, 인간의 계획만을 내세우려 하면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며, 인간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을 받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와 영적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삼중혁명의 영성 / 한기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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