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온 교훈 7:14~19

초막절은 7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레 23:34).

예수님이 명절 중간에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공식적인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으셨음에도 뛰어난 교훈을 전하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곧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이 교훈의 출처라고 하십니다(16절).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교훈의 목적이라고 하십니다(18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의가 없고 진실합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가르침의 동기와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진실하고 참된 근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에 대한 수많은 예언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은 이를 모두 성취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이 단순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는 진리임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인간이면서도 죄를 짓지 않으셨고,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이는 그분의 가르침이 이론이 아니라 직접 살아내신 진리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맹인을 보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표적들은 그분이 하나님께 속한 분이며, 그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증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강력한 증거를 가진 사실이다. 부활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이 참됨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전에는 두려워 도망쳤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변했다. 이는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진리를 체험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이는 그 교훈이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임을 증명한다.

나의 일(사역, 가르침)에는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 영광을 위한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나요?

동기의 중심이 하나님인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바른 방향에 서 있는 것이다. 혹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기도로 마음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찬양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고 있다면, 그 사역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순종과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가? 찬양을 준비하고 인도할 때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을 구하며, 팀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지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가? 찬양을 인도할 때 내 계획과 실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의지하는가?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께 주도권을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찬양이 예배로 이어지는가?

단순한 음악 활동이 아니라,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헌신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람들의 반응보다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지속적으로 점검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찬송으로 태어났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비록 내가 연약하여 완벽하지는 못하나

찬양팀으로 앞에 나와서

우리 교회의 대표로 하나님께 찬양을 하는 내 마음은

그 순간 만큼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만을 바라보게끔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다.

교회의 얼굴이고 잘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부담이 없고 본향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다.

예수님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홀로 높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길 바랍니다.

결코 그 거룩함을 안 사람은 찬양의 자리에서 허튼 생각 먹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높이는 자는 교만으로 치신다.

열매는 행실로 나타난다.

내가 아무리 그 순간만큼은 깨끗한 마음으로 한다고 해도 평상시 행실이 거룩함을 잃으면,

반드시 사람들은 나에게 편견을 가지고 위선적인 반 그리스도 인이라고 나를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성령님께서 매우 근심하실 것이다.

매일 매일이 주일임을 항상 잊지 말며 항상 예수님이 있음을 놓치지 말자,

증오하지말자,

혐오하지말자,

화내지말자,

그냥 나는 예수 반석 위에 있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풍파가 와도 넘어지지 않는 예수 반석 위에 있다.

두렴없는 믿음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하나님 영광을 위한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높이려는 깊은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존재이다. 따라서 내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7).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셨기 때문

"내가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요한복음 8:50).

예수님조차도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셨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

"너희는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다.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당연히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나의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

"너희가 주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결국 내 삶의 가장 깊은 기쁨과 만족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기는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반응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나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진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라 7:20~24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 사역에 대해 변론하시며, 유대인이 안식일에도 시행하는 할례를 예로 드십니다.

유대인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제8일에 언약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행합니다(레 12:3).

할례를 행할 시기가 안식일과 겹치는 경우, 할례 규례를 더 중시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모세 이전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22절; 창 17:9~14).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5:8~9)은 안식일 규례보다 인간의 생명을 우선시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정죄해 죽이려 합니다(5:16~18).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모세 율법을 내세웁니다(출 31:15). 진실한 의도를 살펴서 공의로 판단하지 않고 외모(겉모양)로만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예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정죄하자 하신 책망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본질이 아닌 형식과 외적 기준에 집중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일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로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며(요한복음 7:41-42),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율법을 어기며 살인하려 한다고 지적하셨다(요한복음 7:19).

예수님은 단순히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외모나 겉으로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옳다고 하셨으며 율법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면, 인간적인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인간의 판단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이나 편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해야 한다.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사람은 겉모습과 행위를 보고 쉽게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판단할 때 상대방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의도와 마음을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마태복음 7:5).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공의롭고 정직한지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로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한복음 16:13).

성령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판단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랑과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야고보서 2:13).

판단할 때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회복과 용서를 포함한다.

상황을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어떤 일을 듣든지 먼저 자세히 듣고 살펴 알라" (신명기 13:14).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충분히 듣고, 상황을 신중히 살피고,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은

  1.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2.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고,
  3.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4.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5. 사랑과 긍휼을 잊지 않고,
  6.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공의로운 판단을 실천할 수 있다.

어떤 판단 기준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옳을까요?

성경적인 기준과 사랑의 관점을 중심으로 삼는 ㅓㅅ이 중요하다.

사랑과 은혜의 시각으로 본다.

예수님꼐서 우리를 바라보시듯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듯 상대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래서 생각을 매우 많이 해야한다.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판단하기 힘들다, 그래서 행동만 보고 즉시 판단하기 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한다.

공의로 판단해야한다.

무조건 이해하려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 16:2)

누군가를 살리는 길은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권면하고 도와주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살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죄라고 나와있는 것을 버젓이 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하면 너에게 좋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진정 이웃이다.

나 역시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교만한 태도로 상대를 정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의 행동을 볼 때, 그 결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인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6) 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 생각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야고보서 1:5)

결국, 상대방을 바라볼 때 사랑과 진리, 겸손과 분별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적인 감정이나 편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말은 확 나오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거나 책임을 묻거나 몰아가거나 가스라이팅하거나

정신적으로 공격하는 경우에 우리는 말이 내 뜻대로 나온다.

성령님의 뜻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할 수는 없더라도,

내 마음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를 잘 해야한다.

아 이 사람이 나를 공격해서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기도를 많이 해야한다.

또한 이 사람이 불안해서 나를 공격하는구나 불쌍하다, 긍휼한 마음을 내게 주세요, 이 사람과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즉각 기도해서 성령님께 의지해야한다.

공격 받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 위에 우리를 세우신다.

그럼 우리가 말을 내 뱉을때 후회가 아닌,

성령 충만한 은혜의 간증이 되는 기적을 맛 볼 수 있다.

이런 센스나 말재주 자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참신하고 기발하고 신박하고 멋진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말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냥 빚이 무슨 대수랴 영생을 주신다.

몇 천억 몇 조를 줘도 영생은 못준다.

우리는 그 영생을 받은 사람이다.

만 데나리온의 비유를 보면, 그렇다.

한 종이 만 데나리온 을 왕에게 빚졌다.

만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약 16만년 치 품삯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왕이 빚을 갚으라고 하자, 종은 엎드려 간청하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왕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다.

이 장면에서 왕은 하나님, 빚진 종은 우리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로 용서해 주셨다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약 100일 치 품삯으로, 비교적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엄청난 죄의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모습과 같다.

다른 종들이 이 일을 보고 왕에게 알렸다. 왕은 "네가 그렇게 큰 빚을 탕감받았는데, 너도 동료를 용서해야 하지 않느냐?"라며 그 악한 종을 책망했다. 왕은 그 종을 옥졸들에게 넘겨 고통을 받게 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받았다. 만 데나리온은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크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전부 용서해 주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백 데나리온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아주 작은 것이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비유 끝에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경고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의 질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고 대답하셨다.

이는 단순히 490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가? 작은 상처라도 품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 받은 만 데나리온의 은혜를 기억하며, 백 데나리온의 잘못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우리와 싸우는 누군가는 혹시 지옥 갈지도 모르는 불신자들일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죽어서 낙원으로 갈 것이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새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다.

예수님과 영원히 거하는 천국을 맛 보게 될 것이다.

그 불신자들이 너무 불쌍하다. 이 기쁨을 모르고 인생을 살다니…

너무나도 안타깝고 안타깝다.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본향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고향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

이단 교주들이 아무리 자기가 메시아라 외쳐도 절대 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나처럼 거룩하라!”라는 말입니다. 이단 교주들의 특징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삶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늙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후계자를 걱정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돈, 막대한 부동산과 보화들을 아무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이리저리 고심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육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사람들을 유혹했지만, 정욕과 죄의 길로 가다가 멸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참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고 이단 교주 등을 내세운 사탄에게 마음을 뺏깁니다. 외모로 속이는 사탄에게 현혹당하는 것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말이 자기 입맛에 맞으니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 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고 다 옳다고 생각하니 자기 죄와 허물을 못 보고, 죄를 사하러 오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버리십시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모든 것을 내주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갈보리 언덕으로의 여행 / 유재명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이며, 그분의 말씀은 불의가 없고 진실함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으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가르침과 사역이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증하며, 그분의 부활이 모든 말씀의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저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세상의 기준과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공의로 판단하며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찬양과 사역이 하나님을 높이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소서. 찬양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경험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자가 되게 하소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찬양이 단순한 음악이 아닌 참된 예배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주일 예배의 순간만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주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되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거룩한 삶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판단이 외모나 형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 기초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게 하옵소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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