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의 불신앙 7:1~7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성장한 형제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나타내길 좋아하는 자로 여길 뿐입니다.
초막절이 다가오자 형제들이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때’(헬라어로 ‘카이로스’)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답하십니다(6, 8절).
여기서 ‘때’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대에 올라갈 시간이 아직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십니다.
형제들이 예수님께 유대로 올라가시라고 하자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셨나요?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씀하며, 형제들은 때에 상관없이 갈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음을 밝힌다. 또한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지만 형제들은 미워하지 않음을 언급하며, 형제들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시고 자신은 때가 차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한다.
내가 사람들의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때를 기다릴 일은 무엇인가요?
인간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때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
또한, 내 고집과 아집, 내가 하고 싶은 것, 욕구나 욕망 충동적인 상황에서 이를 즉흥적인 충동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예수님께 의탁하며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도 내가 기다려야하는 부분이다.
운동과 신체 목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더 빠른 성장을 위해서 무리하게 중량을 올리거나 식단을 급격히 바꾸는 대신,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기타 연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급한 마음에 무작정 새로운 것을 늘리기보다,
기본적인 코드 진행과 스케일을 충분히 숙련하며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감정이나 주변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빌립보서 4:6-8 KRV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님 7:8~13
명절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은밀히 유대로 올라가십니다(8, 10절).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때가 찬 것을 아신 것입니다.
둘째, ‘이 명절’(8절)이라는 표현에서 세상 ‘장막절’(초막절)과 예수님 자신인 ‘참된 장막’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곧 세상 장막절에는 참여하시지 않아도, 자신의 참된 장막에는 참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8절)로 나중에 올라갈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넷째,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예수님 방식대로 ‘은밀히’(10절)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동에는 모순이 없으며, 그분의 계획대로 그분이 정하신 때에 행동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명절에 은밀히 올라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명절에 은밀히 올라가신 이유는 하나님의 때를 따르기 위함이다.
형제들이 먼저 유대에 가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들의 기대나 압력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움직이심을 보여준다.
또한, 유대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가면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예수님은 명절 중반에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움직이셨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로, 주변의 압박이나 감정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하나님의 뜻과 때를 분별하며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내 삶에서 사람들에게 알리기보다 조용히 진행할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조용히 진행할 일인데 여기다가 적으면 조용히 진행하는게 아니게 된다..
모순적인 질문인데, 이 경우 삶에서 조용히 진행해야할 일은 몇가지가 있다.
첫번째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는 경우이다.
보통 취업, 군대, 연애, 결혼, 자녀양육과 같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합하시기 원하셔서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존 받는 존재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자유의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결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의 조언은 아무리 현답이라고 해도 결국 최종결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분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고민을 외부에 알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내면에서 깊이 숙고해서,
성령님의 감동을 먼저 듣고난 후, 순종하였고, 그것이 은혜이고 축복이 되었다라는 것을 나누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어차피 아무리 조언을 들어도 자기가 마음에 기운 쪽으로 행동하고 결정하게 되어있다.
이미 답은 내 안의 성령님께서 강하게 알려주고 계신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이 도움이 되고 참고할 만하지만, 너무 많은 의견에 휘둘리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답을 찾아야한다.
죄인의 인생을 같은 죄인에게 맡길 것인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길 것인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부족할지라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바람직한 선택이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의 기준에 대한 문제이다.
예시를 들면 유혹과 마음의 싸움을 벗어나기 위한 사투이다.
나는 세상에 너무 찌들다가 회개를 해서 술과 담배, 안 좋은 세상의 기준에 너무 더렵혀져 있었다.
이런 부분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과 깨끗함, 정결함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유혹과 마음의 싸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과 단 둘이 교제하여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핵심적인 신앙고백과 간증이 수도 없이 많다.
수 많은 방법으로 나를 치유해주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찬송과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과 단 둘이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면서 치열하게 거룩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그로 인한 수도 없는 간증이 많다.
내가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며 기도하고 절제하는 과정으로 인해서 느낀 점이 무수히 많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해봐야 공감이 되고 얼마나 힘든지 아는 법,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다가와서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묵상을 읽고 있는 당신도 사람들에게 알리기 보다는 하나님과 단 둘이 해결해야하는 영역의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절제(Self-Control) 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뤄야할 아주 개인적인 싸움이다.
결국 누구도 대신 싸워 줄 수 없으며, 조언을 듣는다 해도 실질적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직접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과 나만이 해결해야 할 깊은 싸움이지만, 때로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격려를 받을 수도 있다
만약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신뢰할 수 있는 멘토와 상담하거나 함께 기도할 사람을 찾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나는 많은 부분 하나님과 함께 이겨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줄 믿는다.
신뢰할 수 있는 영적 멘토와 상담하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하겠다.
분명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단 둘이 나눌 부분이 있다.
그래도 너무 큰 은혜를 받아서 나누고 싶다면,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표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절제와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순결한 마음과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누면 불필요한 오해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절제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나누는 방법과 대상에 신중해야 한다. 목장 모임 같은 공개적인 자리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멘토나 하나님 앞에서 직접 씨름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
세번째로는, 영적 성장과 내면의 변화이다.
예수님 중심의 대화법이나 나의 느낀점은 성령님께서 나에게 인도하시고 깨달음을 주셔서 나에게는 너무나도 쉽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는 뚱딴지 같은 소리일 수가 있겠구나, 사람에 따라서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누구나 하기 때문에 민감하지도 않고 철학적이라도 인간이라면 이정도의 사유는 누구라도 한다는 편견이 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면의 영적인 훈련은 남들에게 과시하기보다는 조용히 진행할 때 더욱더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내가 말씀을 더 묵상하고, 기도를 더 깊이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단히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낼 필요 없이 조용히 쌓아가야할 일이다.
내가 단단히 착각한 것은 티를 안내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어보인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더 나보다 믿음이 더 두터운 것이다. 하나님과의 비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령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지만, 때로는 조용히 묵상하는 것이 더 깊은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나는 성령님께서 알려주신걸 이 은혜를 나누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나누곤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미 알고 깨달은 사실이라는 점도 내 시야를 성령님께서 또 넓혀주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터치가 안되고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내 간증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개적인 블로그 작성하는 자리이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나님과의 나눔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도 나에게는 은혜이다.
혹여나 내 부족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한 길로 반드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네번째로, 특정한 갈등과 사람들간의 문제이다.
우리는 삶면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것 같다.
감정 소모하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너무 신경쓰이고 마음에 무거운 짐이 생긴다면 우리는 서로 나눔으로 인해서 홀가분한 마음이 들때가 많다.
형제 자매님들이 내 편을 들어주시니까 말하고 나면 너무 홀가분 한 것이다.
하지만 가끔 나누는 이야기들이 남을 비방하는 듯 들릴 수도 있는데, 그런 마음을 버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이야기가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며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구인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전혀 그럴 수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갈등과 사람들간의 문제는 오해가 전혀 없도록 지혜롭게 말하고 선을 잘 지켜야할 것이다.
말하다가 너무 열받아서 감정이 올라오는 것도 절제해야할 것이고
화가 나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가 있을 수 있지만, 그때에도 절제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갈등과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과 결국에는 성령님의 충만으로 인해서 화해하고 잘 지냈다라는 결론이 도출이 되어야
다른 성도님들에게 답답한 마음과 시험을 주는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항상 은혜가 되는 이야기는 할 수 없겠지만, 최대한 그래도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다.
다섯번째로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서부터 형성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사랑을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깊이 있게 실천해가는 과정은 공개적으로 알리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다루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참된 겸손의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겸손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조용히 훈련해야 하는 덕목이다.
겸손한 마음은 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며,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더라도 겸손은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롭게 살려고 하는 노력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나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변화이다.
의로운 삶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보다 조용히 하나님꼐 순종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의로움에 따라 실천된다.
인내와 절제는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조용히 훈련된다.
이 훈련은 내 삶의 모든 면에서 작용하며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절제와 인내를 배워갈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이 있게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알리기보다는, 내 삶 속에서 꾸준히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일상적인 기도와 묵상은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중요한 시간이므로, 이를 외부에 알리기보다는 나 혼자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이 세상에서 드러나거나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함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자신이 행하는 선한 일을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만 아시게 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성품 변화는 외적인 인정이나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야한다.
복수와 보복을 멀리하고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야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살아가는 보복의 법칙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으로 생각해야한다.
복수심, 보복심을 버리고, 무조건 적인 용서와 겸손함,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 정의와는 반대로 사랑과 온유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 그리고 우리에게 피해를 준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하며,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삶,
그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며, 이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시간이다.
그것만이 가치가 있으며 다른 모든 것은 낭비되는 시간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힘들지만,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이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만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을 경험한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원수와 싸우고 헐뜯고 욕할지라도, 마지막에는 용서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6:14-15 KRV 말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이다. 즉각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즉각 우리를 용서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들을 강하게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삶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믿음은 증명되지 않는다. 믿음은 단지 말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로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증오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을 주세요. 제가 더 큰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세요. 나를 용서하신 것만큼 저도 내가 증오하는 상대를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세요. 오직 성령 충만을 간구합니다. 아버지, 원수를 증오하는 마음을 품어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도와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고 기도하면 즉각 용서의 마음을 불어주시고 기름 부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자기애를 뛰어넘는 신앙
오늘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며 자기애에 몰입한 그리스도인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높이고 그분만 자랑하기보다는 ‘자기 성취’, ‘자기만족’, ‘자기 발전’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자기중심적 문화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의 정신은 교회 안에도 슬그머니 흘러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기보다는 “하면 된다!”, “나도 성공할 수 있다!”라고 외치며 성령보다 앞서서 행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최근 어느 분을 전도하다가 사람들의 신앙 인식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는 나를 위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 준다는 거요?”, “교회에 나가면 교회는 나를 위해 무엇을 제공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시대정신은 말세의 특징입니다. 말세에는 하나님을 제쳐 두고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복음의 주체는 내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교회에게 하고픈 말 / 류호준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때에 맞추어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기대나 압력에 휘둘리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본받아 제 삶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특히 인간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때, 즉흥적인 반응을 피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다스려 주세요.
제가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도록 절제하고, 인내하는 마음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제 삶의 목표들, 특히 운동, 신체 목표, 기타 연습에서 무리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세요.
제게 필요한 만큼 천천히 발전하며,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께서 명절에 은밀히 올라가신 것처럼, 제 삶에서도 때로는 사람들에게 알리기보다는 하나님과만의 교제 속에서 조용히 진행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제게 알려주시고, 사람들의 압박과 외부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주변의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저를 인도해 주세요.
특히 내면의 싸움과 영적 성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용히 쌓아가며, 외부의 인정이나 과시보다는 깊은 내적 변화를 이루어가도록 인도해 주세요.
절제와 인내의 문제에서,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저의 내면을 더욱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 삶의 모든 순간이 예수님의 때에 맞춰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7 : 25 ~ 36 (0) | 2025.01.25 |
---|---|
요한복음 7 : 14~24 (0) | 2025.01.24 |
요한복음 6 : 60~71 (0) | 2025.01.22 |
요한복음 6 : 41~59 (1) | 2025.01.21 |
요한복음 6 : 22~40 (1) | 2025.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