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의 능력 있는 사역 11:1~6

능력과 권세를 부여받은 두 증인은 어떤 사명을 감당하나요?

두 증인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극적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1,260일 동안 예언하는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두 촛대’로도 묘사됩니다.

두 증인은 입에서 불을 내기도 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못하게도 하며,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능력과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두 증인의 사역은 교회의 사명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1:5).

하나님의 교회인 내가 일생 동안 충성되게 감당할 사명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계명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성경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어떤 계명들을 매일은커녕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하나님을 온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다해 매일 매순간 사랑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마태복음 22:36-38). 하나님을 모든 때에 완벽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매일 짓는 죄입니다.

기본적인 사명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이 떠날때가 참많다,

거룩한 척하지만, 힘들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붙들 수 밖에 없다.

이 순환논리를 거부하고 떠나간 사람들, 얼마나 많을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시지 않아서, 거룩함을 몰라서, 그 깨끗함을 몰라서, 지존하심을 몰라서, 떠나간다,

하나님께서는 지존하시며 거룩하시며 가장 깨끗하시며 의로우시며 정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다.

내 평생 힘을 다해서 기회가 생기는 틈틈이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서로 사랑으로 섬기고 나눔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며 날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길 원하신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며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시간 자원을 통해서 그분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충성되게 헌신해야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보여 달라고 간구하길 원합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하며 인도하심을 따라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내게 주심을 믿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길 원합니다.

두 증인의 죽음과 최후 승리 11:7~14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은 오늘날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나요?

증언의 사명을 마친 후 두 증인은 죽임을 당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시체는 매장되지 못하고 놀림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교회가 환난과 고난을 겪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두 증인에게 ‘생기’가 들어가니 다시 살아납니다(11절).

그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건은 승리의 절정을 이룹니다.

이는 하나님이 두 증인의 증언 사역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변호하심을 나타냅니다.

또 원수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복음의 증인들도 멸시와 수치, 그리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증인의 모범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증언하셨듯이, 그들도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교회는 증인들의 순교 위에 세워졌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복음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순교야말로 최상의 증언이요 그리스도인의 최후 승리입니다.

내게 순교의 자리는 두려움과 수치의 자리인가요, 영광의 자리인가요?

당연히 순교는 영광의 자리이다.

순교하지 않더라도,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

인간의 연약함마저도 공의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성경에 바벨론의 노예로 살지언정 우리를 살게하신다.

순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누가 죽고싶겠는가? 벽에 똥칠해가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점을 하나님께서는 또 사용하신다.

그러면서도 복음 전파에 힘쓰도록 또 사용하신다.

전부다 순교하면 지하교회가 왜 있고, 지금도 기독교를 믿으면 사형하는 나라에서 왜 몰래 몰래 섬기겠는가

그럼 복음 전파가 안되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노예가 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어디에도 있다, 살아서 복음을 전파할 사람이 있고, 죽어서 복음을 전파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의 생명이고 진리이시고 회복이시며

나는 이 생에 미련이 더 이상 없다.

진정한 진리를 알았으니,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임을 알았으니,

이미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으니,

새로운 삶을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권대로 사는 것 뿐이다.

그저 하나님께서 더 살으라고 하시니 사는 것일 뿐, 이 세상에서 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드리는 것일 뿐이며, 내 생명은 언젠가 그저 삭아서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90년 후인지, 9년 후인지, 9달 후인지, 9주 후인지, 9일 후인지, 9시간 후인지, 9분 후인지, 9초 후인지 알 수가 없다.

온전히 주님께 내 생명을 맡기는 날이 온다면, 성령충만 주시길 바라고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담대한 믿음을 내게 주시길 바랍니다.

강한 믿음을 내게 주시옵고,

다윗의 믿음을 주시고,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을 주시고,

바울 사도의 믿음을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죽을 날을 안다면, 미래를 안다면, 내가 하고싶은 대로 살것이다.

1년후에 죽는다고 알면 뭘 가장 하고 싶겠는가?

다 떄려치우고 복음 전파한다고 난리 칠 것이다.

그래서 늙은 노인들이 오직예수 불신지옥 피켓들고 전도하는 것이다. 급하기때문에,

하지만 그것 자체도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일 뿐, 복음 전파는 그렇게 강압적이고 단순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한 영혼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혀 미래는 모르게 하여주시고,

오늘 주어진 내 삶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송하게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두려움은 인간적인 약함에서 비롯된다.

세상의 시선이나 거부로 인해 수치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순교를 믿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최고의 충성으로 본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의 절정이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인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구원하리라"(누가복음 9:24)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2:10에서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은 순교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강조하셨다.

순교는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에 동참하는 것. 이는 고난을 넘어선 하늘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로마서 8:17).

순교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믿음으로 서게 된다(디모데후서 1:7).

순교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빌립보서 1:21).

순교는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헌신과 사랑의 표현이다.

사람이 말만하고 행동을 안하면 얼마나 꼴사나운가?

나의 묵상 하나하나가 쌓여서 언젠가 순교할때 당당히 순교할 수 있는 자가 되길 간절히 바래본다.

두렵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은혜 속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다.

기도로 하나님께 힘과 확신을 구합니다.

그리고 순교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 있는 시간 단 1초라도 나는 내가 죽어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작은 것이 소중히하고 자족할 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내가 교회입니다

제가 처음 QT를 했을 때 날마다 은혜를 받고 기뻐서 그 내용을 구역에서 나누고자 하면, 아무도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왜 교회에서 시키지도 않는 걸 하고 그러지?’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성도가 제 나눔에 은혜를 받고 눈에 띄게 변화되어서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그리스도, 돈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삶이 복 있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복 있는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했던 신앙 고백에 예수님이 얼마나 기쁘셨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6:18). ‘음부’는 지옥, 죽음을 말하는데 이 땅이 모두 음부의 세계입니다. 그것은 공동묘지처럼 입을 쫙 벌리고 있습니다. 내 속에도 음부의 권세가 있고, 안 믿는 집안 식구와 친구들도 다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나를 기다립니다. 온통 죽음의 세상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 고백이 확실한 사람은 그 권세를 뚫고 나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교회가 온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될 때, 그 사람은 교회입니다.

천국을 보여 주는 인생 / 김양재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매번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잡아주십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드립니다.

나의 구주되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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