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와 빈 무덤 20:1~2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치유받은 후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눅 8:1~3).
그녀는 아직 어두울 때에(새벽 3~6시 사이) 무덤을 찾아갑니다(1절).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막 16:1).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이 십자가 죽음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어집니다.
무덤의 돌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 시신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요 핵심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깊은 사랑과 헌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이후,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며 섬겼다(눅 8:2). 그의 사랑과 헌신이 너무 커서 해가 뜨기도 전에 무덤을 찾아갈 만큼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다.
-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 당시 유대인 장례 문화에서는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안식일 때문에 급하게 장사를 치렀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을 더욱 정성스럽게 모시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막 16:1, 눅 24:1).
-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
-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막 9:31-32).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섬기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 애통함과 슬픔 때문에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막달라 마리아는 엄청난 슬픔과 절망 속에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은 슬픔 때문에 새벽부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애통해하며 주님을 기억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 새벽에 움직이는 것이 더 안전했기 때문
-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받고 있었다. 대낮에 무덤을 찾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지 않는 새벽에 움직였을 수도 있다.
-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의 상징적 의미
- 성경에서 ‘어두움’은 슬픔, 절망, 믿음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요 13:30, 창 1:2). 하지만 바로 그 어두움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소망을 주시는 사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이른 방문은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내게 어떤 소망을 주나요?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받은 그 은혜를 잊지 말라. 이는 너의 힘이 아니라, 나의 사랑으로 된 것이니, 너는 나를 찬양하며 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라." (이사야 43:10, 마태복음 28:19-20 참고)
나에게 믿음이란 깊은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나는 한때 교회를 멀리했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고모들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고, 교회의 모습이 낯설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내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여겨졌고,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나 꾸며진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면 굳이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아나실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 속에서 신앙을 멀리하며 살았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동안, 영적으로도 조금씩 변화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을 때, 내 안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내 삶을 새롭게 하는 거룩한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돌이켜보게 하셨고, 내가 걸어온 길이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셨다.
나를 끝까지 기다려 주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를 품어 주셨다.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계가 없다. 우주의 모든 별을 합친 것보다 더 찬란하고, 그 어떤 어둠보다 더 깊은 사랑이 내게 임했음을 느꼈다.
그 사랑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하나님의 존재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상, 나도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지만, 내게 주신 은혜가 크기에 나는 그 사랑을 나누고 싶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빈 무덤이 부활의 소망이 되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도 내 영혼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며, 나의 간증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뜨거운 사랑과 감동을 주셨고, 그로 인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 은혜를 열정적으로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에 스며들고, 내 영혼의 양식이 된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이에게 친히 찾아가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끌어 가실 것이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내게 크고 확실한 소망을 준다.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믿음 속에서 깊이 새겨야 할 진리를 말해준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증거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이 말씀처럼, 나도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 육신이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소망이 있다(고전 15:20-22).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내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내가 아무리 연약해도,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새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더 이상 죄의 정죄 아래 있지 않으며, 나는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다(롬 8:1-2).
막달라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듯이, 내 삶에도 어두운 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빈 무덤은 그 어두움을 끝내고, 새 아침을 여는 증거다.
예수님의 부활은 내 절망이 끝이 아님을 보증한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커 보일지라도, 주님이 역사하실 때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내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신다. 내가 외로워도, 두려워도, 길을 잃어도 예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제자들은 실패한 인생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빈 무덤 이후,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내 과거가 어떠했든지, 빈 무덤을 통해 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 안에서는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부활을 알지 못하는 두 제자 20:3~10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요한)가 즉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온몸을 쌌던 ‘세마포’가 머리를 쌌던 ‘수건’(11:44 참조)과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놓인 것을 확인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이 빠져나갔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도 무덤에 들어가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놓인 것을 확인합니다.
‘빈 무덤’은 막달라 마리아에 이어 두 제자도 확인한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일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과 연결해 깨닫지는 못합니다(9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보혜사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22절; 14:26).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에서 확인한 것은 무엇인가요?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요한)가 무덤에서 확인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과 놓여 있는 세마포였다.
📖 요한복음 20:3-8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놓였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이 장면에서 그들은 다음을 확인했다:
-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 세마포(예수님을 감쌌던 천)가 놓여 있었다.
-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져 있었다.
특히 요한은 이 광경을 보고 믿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을 의미한다.
내가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일 일은 무엇인가요?
내 삶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었다.
📖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이사야 55:8)
그것 모두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그리고 모든 나의 과거를 스스로 용서했다.
📖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많은 삶의 굴곡을 지나왔다.
아버지께서 알코올 중독으로 힘들어하셨고, 가정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했다. 결국 돌아가셨지만… 꼭 천국 가셨길 바란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고, 군대에서는 상사의 거친 말과 행동 속에서 견뎌야 했다. 외딴 섬에서의 군 생활도 쉽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서는 인천에서 5년 동안 힘든 직장 생활을 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시간들도 많았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버텨야 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 시절 역시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2-3)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리해주시고 내 인생의 찬란한 황금기라고 말해도될 정도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셨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이것은 기적과도 같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고난이 찾아올 것이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나는 이미 내 나이 또래보다 더 큰 연단을 했다.
내 멘탈은 이미 70대 80대 보다 더 현숙하게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는다.
📖 "오직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며, 명철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도다." (잠언 2:6)
누군가의 죽음은 그만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5)
예수님의 죽음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인간은 죽으면 반드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
심판과 영원한 삶이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사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다.
📖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5)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십자가의 구속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또한 새 하늘 새 땅에서 지금 이 땅에서 다시 부활하여
예수님의 신부로 다시 태어나서 영원토록 예수님을 찬양할 것이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계시록 21:1)
이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한다.
📖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8)
아니라면 그냥 공상이나 망상으로 그치는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와 진리이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도구이지만,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특히 다음과 같은 진리들은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언과 성령의 감동을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심)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신다고 증언한다.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3. 구원의 은혜(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음)
세상의 논리는 **"대가 없이 얻는 것은 없다"**이지만,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한다.
📖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4.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
이성적으로 보면 고난과 고통은 피해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5. 기도의 능력과 응답
이성적으로는 기도하는 것이 단순한 독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기도의 능력이 현실을 변화시킨다고 가르친다.
📖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믿음은 이성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 물론 하나님은 이성을 부정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게 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해야 한다.
📖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대로 신뢰하는 것—이것이 믿음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삭제되면
19세기 프랑스 신학자 르낭(Joseph Ernest Renan)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다 실패해서 처형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간혹 예수님을 박애주의자나 정의를 위해 희생한 인물, 독립투사의 표본으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설교의 방향성을 인권이나 복지 향상에 두고,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만 중시한다. 영혼 구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에 매진한다. 죄 사함을 받지 않아도 좋고, 부활하지 않아도 좋으니 예수님의 정신만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보다 더 해롭다. 기독교를 윤리나 도덕 중심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짝퉁 기독교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가 삭제된 기독교는 생명을 잃은 것이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삭제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 말씀은 좋은 가르침일 뿐, 결코 구원의 말씀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을 버리고 도덕과 윤리와 인권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불량 기독교를 믿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나의 구주시며, 내 삶의 왕이심을 고백할 수 있다.
그래도, 믿음이 필요하다 / 강정훈_ 두란노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던 그 간절한 사랑과 헌신을 묵상합니다.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나아간 그녀처럼, 저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에, 빈 무덤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사망이 끝이 아니며, 절망이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활의 기적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제 마음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더욱 강하고 담대해지게 하소서.
주님, 저의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들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연약한 저를 붙드시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주셨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죄와 무너짐 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저는 새 생명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살리셨으니, 이제 저 또한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하소서.
주님, 믿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빈 무덤을 기억하게 하소서. 마리아와 제자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아닌 부활의 증거를 보았던 것처럼, 저도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살아 계심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 세상은 여전히 믿음보다 이성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진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말씀을 더욱 확신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저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시고,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전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끝까지 붙드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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