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00의 새 노래 14:1~5

144,000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장면은 무엇을 뜻하나요?

14장은 대역전 스토리입니다.

요한은 144,000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환상을 봅니다.

승리하신 어린양과 144,000의 찬미가 온 우주에 울려 퍼집니다.

이 장면은 12~13장에 나오는 치열한 영적 전쟁과 대비됩니다.

용과 짐승들이 연합해 하나님 백성을 박해하고 죽이지만, 그들의 승리는 잠깐이고 14장에서 놀라운 반전이 전개됩니다.

용은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분노에 가득 찬 모습으로 하나님 백성을 노려보며 싸우려 하지만(12:17),

어린양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시온산에 서 있습니다(1절).

어린양과 함께 있는 144,000은 영적 순결함을 지킨 자들입니다.

어린양이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최종 승리자는 어린양과 하나님 백성이며, 승리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 나는 어떻게 영적 순결함을 지킬 수 있을까요? ⇒ 회개

나는 비록 연약하여 순간적으로 육체의 일을 행할 수 있고,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상황 속에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의지하게 되는 계기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하신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그의 사랑은 우리의 실수나 연약함으로 인해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나 여전히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죄와 싸우는 과정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죄책감은 사단이 성도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씻겨졌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회개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육체적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질지라도, 예배와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신다.

거룩한 삶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우리의 결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우리의 행위를 스스로 제한하려는 노력만으로는 실패할 수 있지만, 성령께 의지할 때 참된 자유와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용서받은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려니와"라는 말씀처럼, 용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열매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제거하며, 형제들을 사랑과 은혜로 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며, 모든 것이 그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오늘 또 넘어지더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기도처럼, 우리는 매일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유혹과 죄를 끊어내는 것은 성령 안에서 자유를 택하고 거룩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약속이다.

요한일서 1:9 KRV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고린도후서 5:17-19 KRV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레미야 31:31-34 KRV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 103:12 KRV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요한계시록 12:10 KRV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요한복음 8:44 KRV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로마서 6:11 KRV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사도행전 9:1-9 KRV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고린도전서 6: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세 천사의 심판 선언 14:6~13

세 천사가 전한 심판의 경고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두 번째 역전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세 천사가 차례로 등장해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용과 짐승의 경배자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며 승리에 도취되지만, 그들의 승리는 잠깐 동안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패배자입니다.

첫째 천사는 심판의 때가 왔다고 선포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창조주 하나님만 경배하라!”라고 전합니다.

둘째 천사는 바벨론 멸망을 예고합니다.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는 17장과 18장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셋째 천사는 용과 짐승의 경배자들, 사탄의 인을 받은 자들이 불과 유황 심판 곧 지옥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성도가 인내하며 계명과 믿음을 지킬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겸손과 인내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는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삶의 자리를 지켜야하는데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내는 대의 목적과 성취와 만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영원히 보람찬 삶이라는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철학적인 질문이지만, 인류 역사상 모든 철학의 끝은 결국 허무주의였다.

결론은 그냥 공, 허무, 아무것도 없는 것,

인간의 극에 치달으면 공허(Void)와 공이 답이다.

그게 고다마가 말한 것이고, 비어있는 것, 그게 인간의 본질이다.

왜 공허함을 느끼겠는가?

최고 자리에 오른 운동선수, CEO가 왜 최정상에 오른 후에 공허함을 느끼는가?

그가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해주기를 바랐던 말이 있다면 무엇이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그는 “정상에 올랐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미리 말해주었더라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목표들을 추구하느라 여러 해를 허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공허함을 깨닫는다.

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 문화속에서 거기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사업, 성공, 좋은 대학, 부, 인간관계, 성적인 쾌락, 오락, 선행을 베푸는 등,

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 깊은 빈 공간, 즉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낀다고 증언한다.

전도서의 저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많은 부, 수백명의 여자, 왕궁 정원 가장 좋은 음식 술, 모든 오락, 그 끝은 허무이다.

삶은 허무하다고 요약한다.

왜 공허함이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때 지금 이곳에서 경함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인 피조물로 만드셨다 (창 2:18-25).

2)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셨다(창 2:15).

3)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하셨다(창 3:8).

4)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창 1:26).

요한계시록 말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하늘과 땅을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심으로 영원한 상태를 계시한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새 인류와 충만한 관계를 회복하실 것이며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심판을 받아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죄의 저주는 사라질 것이며 더이상 죄, 슬픔, 병, 죽음, 고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원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여 교제하길 원하셨지만, 인간은 죄를 범했으며 교제는 깨졌다.

하나님은 영원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하신다.

모든 것을 성취했지만 죽음 뒤에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그 인생은 헛되며 더욱 비참한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도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원과 영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얻게 된다. 일단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구주로 영접하는 일은 참으로 놀랍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고,

그분에게 배우며 그분의 말씀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소통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할 때 찾을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이제 우리는 선택 할 수 있다.

결국 공허로 끝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로 선택하거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거나

후자는 충만한 삶, 우리의 마음의 소원하는 채워주는 만족과 충족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만군의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르 ㄹ사랑하사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삶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삶.)

우리는 천국에서 가장 앞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을 선택해야한다.

하나님의 일을 직접 목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정 자신의 욕망을 쫓는 일을 그만둔,

주님께 온 마음을 바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가장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아무런 후회없이 자신과 동료 그리고 창조주를 대면할 수 있다.

당신은 대가를 치뤘는가?

치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서 절대로 다시는 굶주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겸손과 인내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하는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요?

모든 순간과 모든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그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이다. 기도의 응답이 늦게 올 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가정에서, 겸손은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보고 화해를 위해 손을 내미는 자세이다. 변화가 더디게 느껴질때, 상대의 약점을 품고, 사랑으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은 오래참음이다.

교회 안에서, 내 생각과 관점이 항상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이다. 교회 내의 상처나 오해가 생길때 포기하지 않고 예배와 섬김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공동체를 세우는데 동참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교만해지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 속에서도 묵묵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믿음을 조롱하거나 비난 받는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고난과 시험의 자리에서 겸손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인내는 그분이 여전히 선하시고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죄성과 싸우면서 겸손은 자신의 약함과 죄를 날마다 인정하고, 자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이다. 인내는 죄와 유혹에 넘어졌을 때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어려워 보인다. 이상적으로 생각된다. 나는 하지 못할 것 같다. 벌써 진이 다 빠진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셨다.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으로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끝까지 이루실 것이다.

믿음을 지켰다 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으려면, 우리의 삶의 자리마다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다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저는 믿을 지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귀여운 자녀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충직한 충견, 충신이 되길 원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찬송가에 ‘최후 성공을 얻기까지’라는 가사는 없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라는 가사만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시지 않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곧 승리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공하신 분이 아니라 승리하신 분입니다.

빠르게 달려와 사라지는 슈퍼 카를 볼 때마다 저 차의 종착점은 어디일지 궁금했습니다. 화려한 슈퍼 카가 성공의 상징은 될 수 있겠지만 승리의 상징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름 내내 땀 흘려 모은 돈으로 단기 선교비를 겨우 내고, 복음을 모르는 땅으로 떠나는 삶이 승리의 삶입니다. 여름휴가 다 반납하고, 일주일 내내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서 배앓이와 변비로 고생하며, 눈물과 콧물로 뒤덮인 아이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그 사람이 승리의 종착역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너는 성공의 종착역에서 인생을 마무리할래, 아니면 승리의 삶을 살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망을 이긴 승리, 생명을 거머쥔 승리, 완벽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날부터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됩니다. 언제 이룰지 모르는 먼 성공, 이루어도 바람처럼 도망가는 성공을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승리자로 삽시다. 내 시간을 이웃에게 기꺼이 내어 주며, 예배하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바람을 잡는 그대에게 / 최병락_ 두란노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모습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찬미가 시온산에서 온 우주에 울려 퍼지는 놀라운 환상을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주님, 이 땅의 치열한 영적 전쟁 속에서도 저를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저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때로는 제 안의 죄를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 속에서도 당신의 자비를 경험하며 다시 일어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영적으로 순결하게 하옵소서. 순간적인 유혹과 죄의 무게에 눌리지 않도록, 제 마음을 정결케 하시고 제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소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저의 간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제가 이 땅에서 인내와 믿음을 지켜야 할 삶의 자리를 기억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인생의 허무와 공허가 저를 삼키지 않게 하시고, 저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달아,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첫째 천사의 선포처럼 창조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둘째 천사가 전한 바벨론의 멸망을 기억하며, 셋째 천사가 경고한 심판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게 하소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모든 삶의 순간 속에서 겸손과 인내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 제가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며,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저의 삶이, 온전히 당신께 드려지게 하소서.

저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을 믿습니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죄책감이나 사단의 참소가 제 마음을 어둡게 하지 못하도록 주님의 진리로 저를 보호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멀리하며 거룩한 길로 걸어가게 하소서.

마지막 날,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서 찬송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그날까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고, 날마다 회개하며 새롭게 되는 기쁨을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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