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행한 기적은 무엇인가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강화에서 이들의 출현을 예고하셨습니다(마 24:24).
‘두 뿔’(11절)은 어린양의 일곱 뿔(5:6)을 흉내 낸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전형적인 거짓 모방을 보여 줍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온화해 보이지만 실상 늑대와 같은 자입니다.
그 역시 사탄의 지배를 받는데, 그의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릴 경배를 빼앗아 사탄에게 바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짐승은 초자연적 기적을 행해 우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에 놀라 우상에게 엎드리게 됩니다.
성도는 초자연적 기적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진리 안에서 기적의 주체와 목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의 말씀으로 기적의 주체, 기적의 목적을 분별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적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항상 기적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분의 뜻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분별하는 것은 너무 쉽다. 기적을 주장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기적을 주장하는 주체가 나, 특정 개인, 사이비 교주, 물질적 도구, 다른 대상이면 싹 다 우상숭배이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한다.
기적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사람을 예배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적으로 내가 로또에 당첨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차피 썩어 없어질 이 땅이며,
기적으로 모든 사람을 살린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차피 다 지옥간다면 말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기적과 표사도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적과 표적을 찾는 무리들에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셨다.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요나의 삶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그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 동안 있었던 사건이다. (요나 1:17).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3일 동안 계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태복음 12:40)
- 따라서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확실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갔다(요나 3:5-10).
이처럼 "요나의 표적"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을 동시에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서 선포하는 복음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회개의 메시지임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과 표적을 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경고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이미 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히 기적을 보려는 호기심이나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표적을 요구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기적을 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믿는 데 있다.
예수님의 부활, 곧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믿음의 증거다. 우리는 기적이나 눈에 보이는 표적에만 의존하기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또한, 요나의 표적은 회개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다.
666과 144,000을 비교할 때 그 차이는 어떠한가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숫자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에, 666도 상징적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666은 무엇보다도 144,000과 대조되는 수입니다.
144,000이 완전하고도 충만한 하나님 백성을 상징한다면,
666은 짐승과 짐승을 따르는 자들의 총수를 상징합니다.
짐승이 제아무리 하나님 백성을 핍박하고 죽인다 해도 그들은 기껏해야 666에 불과합니다.
요한계시록이 강조하는 바는 666이 아니라 144,000입니다.
악한 세력이 승리하는 듯해도 그 승리는 일시적입니다.
이 땅에서 짐승의 표를 받고 성도를 박해한 자들은 불 못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입니다(19:20).
666으로 표현되는 짐승의 힘이 막강한 듯 보여도 그들이 맞이할 최후는 비참합니다.
사람들이 666으로 불안감을 조장할 때 나는 어떤 관점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세상적 권세나 혼란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보호를 신뢰해야한다.
징조가 아니라 항상 깨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강조하셨다.
재림의 징조보다는 우리가 바라봐야할 것은 복음이다.
멸망의 징조, 666과 같은 상징,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복음으로 무장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에 마음을 두어야한다.
숫자 자체에 의미를 두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지나치게 666을 해석하며 공포를 조장하거나 음모론을 만들어낸다.
성경적 근거가 부족할 때가 많으며, 미신이나 샤머니즘, 토속신앙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
강력한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리이다.
짐승의 표는 무서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을 붙들어야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계획을 넘어설 수 없다.
평안의 증거자가 되어라,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힐때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소망과 평안을 나누는 자로 살아야한다.
이미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굳게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성도를 현혹하는 사탄
「천로역정」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은 해석자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해석자의 집 벽난로의 불을 끄려고 계속해서 그곳에 물을 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은 더욱 거세고 뜨겁게 타오릅니다. 해석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은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저기 불을 끄려고 물을 뿌리는 자가 사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물을 뿌려도 불은 거세고 더 뜨겁게 타오르지요.” 그러고는 크리스천을 벽 뒤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로 가니 한 사람이 불 속에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해석자는 말합니다.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그가 구도자들과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은혜의 기름을 부어 구원의 역사가 계속되게 하십니다.”
성도를 현혹하는 이단은 사탄에 속한 무리입니다. 이단은 표면적으로는 자기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재림 예수가 바로 자신들의 교주라고 합니다. 교회보다 이단이 사람을 더 품고 위하며 아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럴듯한 표적과 기적으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시간도 청춘도 재산도 다 착취하고 빼앗아 갑니다. 이단의 문자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다가오는 사탄에게 속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천로역정과 하나님 나라 / 이동원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모든 것을 분별할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와 사탄의 속임수가 난무하여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께 속한 자로서 진리의 빛 안에 거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 해도
나의 마음은 오직 주님께로만 향하게 하소서
기적의 주체와 목적을 분별할 때, 모든 참된 기적은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만약 기적이 주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높이거나 사람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이 거짓임을 분별하게 하시고 멀리하게 하소서.
세상은 "666"과 같은 상징과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저를 두려움의 영이 아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지켜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과 승리 안에서 바라보게 하소서.
짐승의 표와 같은 세속적 표적에 흔들리지 않고,
요나의 표적—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구원의 확실한 증거에 제 믿음을 굳건히 세우게 하소서.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초자연적 기적으로 성도를 현혹하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무장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증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소망이요, 구원의 능력이니,
이 사실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단과 거짓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길만 따르도록 도와주소서.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제 마음의 불을 끄려는 사탄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주님께서 부으시는 은혜의 기름으로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두려움이 아닌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의 증거자로 살게 하시고,
세상이 불안과 혼란 속에서 방황할 때,
주님의 평안과 진리를 전하며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내 구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모든 두려움과 거짓을 이기신 나의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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