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마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끊을 수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구원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왜 우리를 훼방하고 못살게 굽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성도로서 이 땅에서 거룩하고 영광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마귀의 자식처럼 비참하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실질적인 마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확신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이 바로 확신입니다.

만약 구원의 기준을 사람 자신에게 두면 업 앤 다운(up and down)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자기 자신의 상태를 보고 점검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셋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와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라는 웃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들은 더 이상 2세를 생산할 수 없는 죽은 몸이며 그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과 확신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믿음의 결과가 구원이라고 한다면 확신의 결과는 구원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지 확신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확신은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하는데 그냥 날 믿고 사라거나 무작정 그 물건이 좋은 물건이라는 확신을 가지라고 강조합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일 것입니다. 확신은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건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확신으로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게 됩니다.

그래서 확신은 수동적입니다.

믿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확신입니다. 믿음과 확신은 다른 개념이기는 해도 서로 밀접한 관계로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는 믿어지는데 확신이 안 생깁니다”, “나는 주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믿어지지만 나의 삶을 주님께 드려야겠다는 확신이 안 생깁니다” 이런 말은 모순이며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으면 그 안에 확신의 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확신은 다르지만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 때 믿음이 생기고, 또한 믿음이 생기면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성령이 저를 확신시켜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이 로마 가톨릭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깊이 알 때, 그것이 나를 구원해준다는 정보를 통해 믿음을 얻게 된 후 자연스럽게 확신이 따라오는 것이지, 신비주의나 로마 가톨릭처럼 명확한 지식이 없이 성령을 통해 다이렉트로 확신이 생기기를 바란다면 그는 곧 거짓의 영에 휩싸여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놀이공원에 간 아이가 아빠 엄마를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 아이는 당장에 “아빠!! 엄마!!”라고 큰 소리로 부를 것입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더 크게 외칠 것입니다. 과연 고아라면 아빠, 엄마라고 소리치며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위험에 처할 때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부르게 됩니다. “아버지!!”라고 외치고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아와 같습니다. 고통을 당해도 위험이 닥쳐도 아버지를 찾아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아 아이처럼 그들에게 아버지가 없고, 기도할 대상, 기도를 들어줄 대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위기가 오면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서, 내 삶이 어려울 때 “하나님, 내가 힘듭니다. 나 좀 구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나와 가슴을 찢으며 부르짖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힘들어서 소주 한 잔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여행 좀 다녀올게요” 이런다면 그는 영적 고아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누구를 불러야 할지, 누가 들어줄지 모르니까 자기 스스로 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확신이 되십니까? 성령과 더불어 아버지께 부르짖는 사람이 의를 행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올 때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이 견고하면 순교도, 핍박도, 고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따돌림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 황금사슬, 정대운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어느때나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지켜주시니 두렴없습니다.

아버지를 내가 압니다. 절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

아버지께서 나의 아버지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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