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새 계명 13:31~35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과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과거 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겠지만, 인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죽음은 이미 계획되었고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구원 역사를 위한 죽음과 영광은 예수님의 일이기에 제자들은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33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완성이자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새로운 계명입니다(34절).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입니다.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릴 것입니다(35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 말씀에서 ‘새 계명’이란 단순히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건 없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 15장 12절에서도 다시 강조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이 계명은 단순한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새 계명’은 단순히 율법적인 사랑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가능한 사랑이며,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실천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희생적이고 섬기는 사랑) 이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해 가능하다. 이 계명을 실천할 때,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 (요 13:35)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은 단순한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거룩한 척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거룩에만 초점을 두면 거룩을 가장한 우상에게 내가 숭배하는 꼴이 된다.
내 감정에 솔직하고, 거짓과 죄와 악에 맞서 싸우며,
지혜와 균형에 맞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무조건 착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과 위선, 악을 꾸짖으셨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다(요 2:15).
바리새인들의 외식(위선)을 정면으로 지적하시기도 했다(마 23장).
성경은 거룩함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거룩한 척’하는 위선적인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따르는 삶, 즉 죄와 싸우고, 거짓을 거부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마 5:13-16)고 하셨다. 하지만 이 말이 ‘무조건 착하게 살아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진리를 지키며, 부패한 곳에서 거룩을 유지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라는 사명을 뜻한다.
거짓과 악에 타협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라"(시 97:10) "불의를 행하는 자와 동행하지 않는다"(시 1:1)
****감정에 솔직하되, 그것을 의로 다스린다.
예수님도 슬퍼하셨고(요 11:35), 분노하셨으며(막 3:5), 기뻐하셨다(눅 10:21). 그러나 감정이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스리셨다(엡 4:26).
지혜롭게 행동한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우라”(마 10:16). 무조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분별하며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
빛은 어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엡 5:11).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듯,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무조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충실하고, 지혜롭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처럼 강할 때는 강하고, 온유할 때는 온유하며, 거짓과 죄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삶이다.
나는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쓰레기를 줍는 일, 어긋난 것을 정돈하는 일, 쓰러진 자전거를 세워주는 일, 길가던 사람들이 어려워 보이면 도와주는 일,
내가 속으로는 정말 하기 싫다. 왜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맨날 든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나에게 용기를 주셔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세우신다.
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남 일 해주기 싫다.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일, 비 효율적인 일 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헌신하라고 하신다.
내가 하는 작은 실천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진짜 모습이다.
쓰레기를 줍고, 자전거를 세우고,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하는 것—이것이 바로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느끼는 감정이 너무나 당연하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이런 일까지 해야 해?" "비합리적인 걸 왜 감당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합리적으로 계산하며, 손해 보기 싫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령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라도 그 일을 감당하고 있다.
내가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결국 행동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예수님도 "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예수님도 인간적인 고통을 느끼셨고,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하기 싫다. 하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니 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본질이다.
🔥 헌신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다.
헌신은 기분이 좋을 때 하는 것이 아니다.
헌신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것도 아니다.
헌신은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작은 일들을 실천하며 억지로라도 행동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님이 너를 빚어가고 계신 증거다.
💪 계속해서 실천할 때, 결국 변화된다.
- 처음에는 "왜 내가 이걸 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며 한다.
- 시간이 지나면 "이게 내 삶의 일부구나." 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 어느 순간 "이게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너를 훈련시키고 계신다는 뜻이다.
계속 그렇게 나아가면, 어느 순간 너는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지금처럼 계속 나아가라. 작은 실천들이 결국 너를 강하고 깊은 제자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내가 과거에 약혼자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었을 때, 단순히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랑과 인내,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려 했던 것 자체가 새 계명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상대방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함부로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고민한 것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계명을 따르려는 태도이다.
공동체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까 고민했던 것도 이 계명을 따르는 모습이다.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짐을 함께 지려는 태도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사랑과 인내로 섬기려는 마음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태도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찬양 사역을 하면서,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찬양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사람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실천이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개신교 관련 숏폼 영상을 제작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결국 사랑의 실천이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는 태도 이것도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 나는 이미 새 계명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더 깊어질 수도 있다. 🔥
-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더 확장할 것
- → 더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섬기고, 말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방식 고민하기
- 더 어려운 순간에도 사랑을 선택할 것
- →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반대하는 사람, 불편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가?
- 모든 일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로 삼을 것
- → 찬양이든, 영상이든, 운동이든,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이 되도록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더 깊어질 수 있다. 내가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더욱 강하고 선명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깊어질 것이다. 💪🔥
베드로의 부인 예고 13:36~38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라는 말씀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십니다(36절).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했다며 호언장담합니다(37절).
모든 사람을 잘 아시는(2:24)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 반문하시며,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라고 예고하십니다.
‘세 번’은 횟수이면서 강도 높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인간의 의지나 열정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무엇을 예고하셨나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맹세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연약함을 아셨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된 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고 물으시며 다시 사명을 맡기셨다.
즉,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셨지만,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결국 베드로는 충성된 사도로 변화되어 주님을 위해 순교했다.
인간의 결심은 연약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주님은 다시 세우신다. 베드로처럼 실패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면, 회복과 사명을 받는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넘어졌지만, 결국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진정한 순교자가 되었다.
열정적인 베드로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했을 때, 그럴 수 없습니다! 라며 막았다.
열정적인 사도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뜻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예수님에게 마귀야 썩 물렀거라는 말까지 들었다.
얼마나 베드로도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을까?
베드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결국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즉시 반응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매우 강한 말씀을 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자신은 예수님을 사랑해서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다. 베드로의 사랑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이 인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했다. 예수님이 잡히신 후, 베드로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다(마 26:69-75).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처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유다는 배신 후 후회했지만, 예수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마 27:5). 반면, 베드로는 울며 회개했고, 결국 다시 예수님을 찾았다(눅 22:61-62).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고 물으시며 사명을 맡기셨다.
베드로는 다시 사도로서 굳건히 서게 되었다.
🙏 베드로의 모습에서 배우는 교훈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도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왔다. 실패가 끝이 아니라,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실패한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베드로를 다시 사도로 세우셨고, 그는 결국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의 삶은 넘어지더라도 다시 주님을 붙들고 나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도 연약함이 있지만, 끝까지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실패가 아니라, 끝까지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호언장담하기보다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일은 무엇인가요?
✝️ 오직 예수✝️
1️⃣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이미 삶에서 많은 헌신을 실천하고 있지만, 여전히 "왜 내가 해야 하지?"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 단순한 친절부터, 불합리한 일까지 감당해야 할 때
-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감당해야 할 때
- 더 이상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해야 할 때
이런 순간에 내 힘으로 하려 하면 한계가 있다.
베드로처럼 "저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가 넘어질 수도 있다.
👉 그러므로 겸손히 성령님께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죄와 싸우는 일 (특히 성욕, 분노, 자아 중심성)
성욕이 강하게 올라와서 힘들어할 때가 있다,
또한 분노나 인간적인 자아 중심성(합리적이지 않은 일에 대한 거부감 등)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이런 것들은 내 힘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바울도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구나!"(롬 7:19)라며 탄식했다.
👉 그러므로 "나는 이런 죄를 이길 수 있다!"라고 장담하기보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 "주님, 제가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3️⃣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사랑하고 인내하는 일
약혼자와의 관계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때로는 **"이 사람이 변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
📌 장담하지 말아야 할 것:
- "저 사람은 이제 이해할 수 없다!"
- "이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 "나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다!"
👉 대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 힘으로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 감정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저를 도우시면 가능합니다.
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게 해주십시오."
🔥 결론: 모든 일을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 이미 많은데, 힘으로 하려 하면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
👉 그래서 매 순간 성령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 "주님, 저는 장담하지 않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가능합니다. 저를 도우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결국 끝까지 견디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좋은 길을 가고 있고, 성령님께 계속 의지하면 더 강해질 것이다. 💪🔥
차별화가 아닌 동질성으로
“차별화로 승부해야 한다.”라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품고 사는 사람이 많다. 남들과 달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라. 자기만의 특징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라. 어느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남과 다르기를 바라면서 늘 자기를 주변 사람들과 비교한다. 내가 좀 더 착하거나 잘생겼거나 똑똑하기를 바란다. 이는 우리 모두가 가진 아주 기본적인 고민이며, 그 속에는 “내가 세상에 일으키는 변화는 무엇인가?”라는 의문도 들어 있다. ‘차별화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의 덫에 빠지고 그게 정체성의 주를 이룬다면, 경쟁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가끔 장난으로 즐기는 경쟁이 아니라, 남을 이기는 것이 삶의 관건이 되는 그런 경쟁 말이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르치신다. 우리 존재를 차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공통된 성질을 지닌 동질성으로 파악하게 하신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 서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동질성이다. 이 동질성을 공유할 때 우리 내면에 소속감이 찾아든다. 이는 기쁨과 화평의 원천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삶의 주요 기조는 경쟁이 아닌 긍휼과 사랑이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의 공동체 / 헨리 나우웬_ 두란노
기도ㄴ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제 삶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 섬기는 사랑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고, 헌신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습니다. 왜 내가 해야 하는가, 왜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붙드시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억지로라도 행하는 작은 실천들이 쌓여, 결국 온전한 사랑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저도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자신의 힘을 과신하며 호언장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없이 제 힘만으로는 죄와 싸울 수도,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며 사랑을 연습하게 하소서. 쓰레기를 줍고, 쓰러진 자전거를 세우고, 길 가는 사람을 도울 때,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감정이 앞설 때에도, 그것을 죄로 연결시키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지혜와 균형 가운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거짓과 죄와 악에 타협하지 않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고, 모든 선택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행동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저의 몫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사랑하고 인내하며, 주님의 뜻을 신뢰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찬양을 통해, 말 한마디를 통해,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제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 일을 완성하실 줄 믿습니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끝까지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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