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같이 버려두지 않으심 14:15~20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보혜사’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보혜사를 ‘대언자’로 번역합니다(요일 2:1).

영적 아버지와도 같은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제자들은 고아처럼 남겨지게 됩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그 보혜사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하실 분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17절).

곧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영입니다(14:6).

세상은 진리의 영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는 참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이 악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1:9~10).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진리의 영을 알고 그분과 동행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다른 보혜사’를 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께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을 구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후, 믿는 자들이 예수님과 계속된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품을 가진 분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육신으로 계셨지만, 승천 이후에도 그들이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도록 성령님을 보내신 것이다(요 14:18).

성령님은 예수님처럼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임재) 진리를 가르치시며 깨닫게 하시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 이루어가도록 돕기 위해 오신 분이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성령님을 통해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어지도록 계획된 것이다.

나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알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나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합니다.

아주 부끄러운 자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 항상 다시 다가가고자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할 수 있도록 살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다시 성령님께 나아가려는 갈망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역사다.

하나님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상한 마음과 겸손한 심령을 기뻐하신다. 시편 51:17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당신의 의로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족함과 죄를 덮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부끄러운 자식으로 보시지 않는다. 오히려 잃었다가 찾은 기쁨의 자녀로 바라보신다(누가복음 15:20-24).

성령님을 사랑하고, 다시 가까이 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성령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이미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다(요 14:17). 그분께 손을 내밀 때, 성령님은 늘 가까이서 당신의 연약함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신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그 길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가득할 것이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삶의 열매와 내면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그분과 동행하면 자연스럽게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시고, 말씀을 읽을 때 마음 깊이 깨닫게 하신다. 말씀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삶에 점점 나타나는가? 완벽하지 않아도 이러한 성품을 추구하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신 증거이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죄에 대해 민감하게 하신다. 잘못된 길로 갈 때 마음이 불편해지고,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성령의 역사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다. 내 삶의 선택과 행동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에서 나온다면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끄시는 길은 상황과 상관없이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과 확신을 가져다준다. 반면, 불안과 혼란이 지속된다면 내 뜻을 따라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완벽함보다 방향성에 있다. 실수와 연약함 속에서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분께 다시 마음을 내어드리며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걷고 있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사랑 14:21~24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15, 21절).

사랑은 순종에서 비롯되고,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참된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생명처럼 지키며 예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입니다(3:35; 5:20; 요일 4:8).

이런 사랑의 관계가 제자들(사람들) 사이에도 이루어져야 우주 만물은 창조 질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예수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13:34).

예수님이 계명 준수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계명 준수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신 이유는, 계명 준수 자체가 사랑의 열매이자 증거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명 준수가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라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기쁘게 따르고 싶은 것과 같다. 계명 준수는 억지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이다.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와의 관계를 지키는 사랑의 실천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평안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요한복음 8:32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죄와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안에서 사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계명 준수와 사랑을 연결하신 것은 순종이 사랑의 증거이자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을 강요하거나 거래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관계다.

완벽하게 계명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순종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다면, 이미 그분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랑이 먼저이고, 순종은 그 사랑의 열매로 따라오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한 결과로 계명을 지키게 된다.

비록 내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죽기 전까지 매일 날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 나를 성령님께서 돌보아주시길 바랍니다.

가정 혹은 일터 등에서 순종으로 나의 사랑을 표현할 대상은 누구인가요?

핵심

정빈아,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만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사랑의 도전

예수님의 질문, 정빈아,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단순한 행동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겠느냐는 마음의 도전이다.

단순한 행동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겠느냐는 마음의 도전이다.

1. 가장 가까운 관계: 가정

  • 배우자: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엡 5:25)
  • 부모님과 형제자매: 부모를 공경하고(엡 6:1-2), 가족의 약함을 품을 수 있겠느냐? (딤전 5:8)

2. 사명과 책임의 자리: 일터

  • 상사와 동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섬길 수 있겠느냐? (요 13:14-15)
  • 부하 직원과 협력자: 강압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로 대할 수 있겠느냐? (엡 6:9)

3. 삶의 모든 관계: 이웃과 공동체

  • 연약한 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움이 필요한 자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눅 10:33-34)
  • 나와 맞지 않는 자: 원수까지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겠느냐? (마 5:44)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가는 순종

이 질문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 사랑을 너를 통해 흘려보내도록 나를 신뢰하겠느냐?’는 초대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오늘 만나는 이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 순종의 시작이다.

순종은 사랑의 행위다. 작은 말, 행동, 마음 하나하나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이 질문에

“예,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길이다.

이 질문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사랑의 도전이다.

세상은 자기 보호와 자기 만족을 우선하라고 속삭인다. 나를 지키고, 나의 이익을 먼저 챙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한 십자가의 길로 나를 부르신다.

1.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의 도전

세상은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거리 두라”고 한다.

예수님은 “네가 상처를 입더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신다(마 5:44).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나의 안락과 권리를 내려놓고 타인의 필요를 내 것처럼 품는 사랑을 의미한다.

2. 조건 없는 사랑의 도전

세상은 자격과 조건에 따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롬 5:8).

예수님은 묻는다.

"정빈아, 너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무조건적으로 베풀 수 있겠느냐?"

3. 희생과 헌신의 도전

세상은 자기를 지키는 삶을 권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내어주는 삶을 말씀하신다.

"정빈아, 너는 너의 시간과 마음을 나누어 이웃의 짐을 함께 질 수 있겠느냐?"

(갈 6:2)

4.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하는 도전

이 사랑의 도전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감당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요 14:16-17).

"정빈아, 너는 나의 사랑을 네 마음에 채우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

사랑은 순종과 믿음의 선택

이 질문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이다.

"예, 주님. 제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의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사랑의 첫걸음이다(요 16:33).

예수님은 내가 실패하더라도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결국, 이 도전은 사랑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다.

순종의 결정권

식물이나 동물 중에 하나님 뜻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피조물이 있습니까? 동식물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결정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권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중에서 인간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상대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자유 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인격적인 파트너로 만드시기 위해 바로 이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자유 의지를 사용할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란 늘 이랬다저랬다 합니다. 기도하러 가고 싶다가 가기 싫어지기도 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자기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마음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면 마음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질서와 충만과 광명이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 바로 알기 / 황명환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떠나신다 해도 나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을 붙잡습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내가 넘어지고, 실수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조차 내 안에 머무르시며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려 주시고,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 묻고 계시지요? “정빈아,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만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의 연약함을 주께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 제 힘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공동체에서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상처받을까 두려워 사랑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사랑하게 하소서. 내가 가진 시간과 마음을 나누어 이웃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도록, 성령님, 오늘도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으로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완벽하지 않지만,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죽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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