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 12:12~15

예수님을 환호하는 무리는 자신들을 로마 제국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종려나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닉스’는 ‘불사조’(phoenix)를 뜻합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수전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왔고(주전 164년),

그의 형 시몬이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때도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주전 141년).

이렇게 종려나무는 승리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무리가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를 외치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합니다(13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치 왕의 대관식과도 같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바라는 혁명적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이요(슥 9:9), 두려워하는 백성을 위로하시는 평화의 왕입니다(15절).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심을 의미한다. 이는 스가랴 9:9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 달리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당시 전쟁의 왕들은 말을 타고 다녔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오신 평화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군림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릴 정치적 왕으로 오셨다고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죄를 대속하시는 구원자로 오셨다. 예수님의 나귀 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겸손과 희생, 그리고 사랑을 통해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직위나 권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행동할 일은 무엇인가요?

직위와 권위의 속성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세상 말이 있다.

그만큼 자리(직위)와 권력(권위)는 사람을 변화하게 만들고, 가치관을 다르게 만든다.

자리(환경)에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영향력이며 사람에게 명령하는 능력이 권력이 된다.

세상을 어떻게 주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팀장되었다고 상상해보면,

사장이 연봉을 지금보다 3배 올려줬다고 가정해보자,

팀장이 되어서 부하직원을 통솔하게 되는 입장이면,

부하직원이었던 시절보다는 더 회사에 충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하직원을 통솔하는 과정에서 나의 가치관에 따라서 일을 부하직원이 하게되고,

그 부하직원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입장이 된다.

사장의 말에 더 귀기울이게 될 것이며 더 순종하고 더 충성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지에 따라서 자신의 이득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

그만큼 위치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이다.

우리 세상의 이념과 정치성향, 종교, 가치관, OO주의 같은 것들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습성이 있다.

마치 유행처럼 OO니즘, OO주의 등등 새롭게 생겨나고 없어지는 가치관들이 있다.

이것들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시시각각 변화하고 시대정신에 따라서 바뀐다.

인간의 행동은 이처럼 조건과 나의 이득에 따라서 움직이는 이기심에 기반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아도, 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인해서 돈에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 은혜는 바로 그 모든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을 넘어서게 한다.

세상에서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믿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모든 것을 깨버리고, 우리가 가진 직위나 권력, 돈, 이념과 상관없이 진정한 가치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 어떤 권위나 지위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 세상의 이념과 가치는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그 은혜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직위나 권위에 의한 변화를 겪더라도, 그 변화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바라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지 않으며,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참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권위나 직위를 내려놓으라는 말은, 그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심지어 그 권위와 직위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권위와 직위에서 나오는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리더쉽과 하나님의 리더쉽을 닮아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마땅히 행하는,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게 행하라는 뜻이다.

겸손하게 행동하려면?

내가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모든 정죄는 판단에서부터 나온다.

첫 판단부터 내가 그렇게 정했다면, 내 생각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첫 단추부터 이미 첫 판단에 사로잡혀서, (즉, 편견이다.) 결정 지어진 내 마음은 종국에는 파멸로, 지옥으로,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 즉시, 하나님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함부로 또 판단하였습니다. 용서하여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주님의 길로 인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 직위나 권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행동할 수 있는 길이다.

무조건 회개하고 항복하고 순종하면 회복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가 판단받을 것이요"(마태복음 7:2)라고 하셨다.

내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그것이 결국 나를 묶는 올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판단했다면, 판단하고자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지? 성경의 말씀으로 판단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진리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며 빛과 소금의 길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도 똑같이 죄인임을 기억하라고 하셨다.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은 쉽게 보면서 정작 내 안에 있는 더 큰 죄와 교만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은 내 안의 죄를 먼저 해결한 후,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를 도울 것을 말씀하셨다. 즉, 내 안의 교만, 판단하는 마음, 정죄하는 태도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내 힘으로 판단과 정죄의 마음을 버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령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과 겸손한 영을 부어 주신다. 판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즉시 기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한다.

내가 판단받고 싶지 않다면, 나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긍휼과 사랑으로 대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판단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들지만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다. 이 길을 가려면, 내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결국, 남을 판단하려는 순간, 즉시 나의 죄부터 돌아보고 회개해야 한다. 성령님께 새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며,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고 긍휼과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 편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판단과 정죄에서 벗어나 거듭나는 길이다.

섣부른 판단이 판단을 낳고, 정죄가 정죄를 낳으며, 거짓이 거짓을 낳는다. 죄악의 습성은 스스로 끊어낼 수 없으며, 이를 막으려면 반드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왼편으로 향하던 내 마음을 오른편으로 돌리는 것, 즉 회개 없이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생명의 길은 겉으로 보기에 가혹하다. 용서는 또 다른 용서를 낳지 못하고, 오히려 용서받은 자가 다시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헌신은 헌신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착각하는 일이 많다. 참 진실은 외면당하고 짓밟히며, 거짓보다 더 큰 미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길이 오직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실 때, 나는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할 때만 완성된다.

모든 교만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self-love(자기애)"라는 이름 아래 이기심을 미화한다. "너만 생각해",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해",”네 생각이 젤 중요해”, “네 생각을 무조건 존중해”와 같은 말들은 결국 내면을 썩게 만드는 교만과 이기심을 정당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세상이 말하는 "자기애(self-love)"는 흔히 자기 만족과 자아 숭배로 이어진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최고다, 나는 누구보다 중요하다"라는 사고방식이 결국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교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공부, 다이어트, 자기계발, 스펙 쌓기, 취업, 결혼 등을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가르친다.

이것들은 항상 “잘해야지” 라고 끝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데, “잘사는 문제”는 그만큼 인간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 잘 살 수 있다”

예수님 없는 자기애는 결국 나르시시즘으로 빠지고, 예수님 없는 자기계발의 끝 공허함, 교만, 그리고 멸망이 된다.

세상적 성공을 이루어도 만족이 없다. 목표를 달성할수록 더 큰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며 스스로를 신격화한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쌓은 모든 것은 무너질 운명이다.

하나님 없이 자기를 높이는 길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자기계발이 우상이 되면, 영혼은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진다.

바벨탑처럼, 이 세상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공허함만이 남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한다.

자기계발이 예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된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 끝은 영적 파멸이다.

반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계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며, 영원한 가치로 이어진다.

끔찍하지만,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 스스로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한다고 가정해보자,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 스스로를 희생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이어트는 작심삼일로 끝나고, 공부는 지겹고 하기 싫고, 목표를 세워도 번번이 실패한다.

인간은 순간의 쾌락에 쉽게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다.

누워서 유튜브보고 싶고 게임하고 싶고, 밖에 나가서 놀고 싶고, 친구와 술 먹고 싶은게 인간이다.

당연히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참된 사랑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곧 우리의 참된 성장이며, 진정한 자기계발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빛을 비추어 주시기 때문에,

비전이 있고, 꿈이 있고,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성령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시고, 예수님의 심판날에 그 성령의 열매를 수확하실 것이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자기계발이 단순한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이 된다.

다이어트는 자신의 몸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전임을 기억하고 건강을 관리하게되고, 먹고 싶은 유혹이 올 때, ‘내가 이 음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생각하며 절제할 힘을 얻는다.

공부와 목표 달성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음을 믿고 성실하게 노력한다. 공부 자체가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도, "주님이 허락하신 오늘을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계속 나아간다.

유혹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다, 순간적인 쾌락보다 영원한 가치를 바라본다. 유튜브나 게임에 빠지고 싶을 때, "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절제할 수 있다.

실패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게 된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붙드시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과 함께하면 자기계발이 단순한 욕망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된다. 목표를 이루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가는 길이 된다.

핵심 차이점

  1. 자기 의지 vs. 예수님의 힘 – 내 힘만 믿으면 쉽게 흔들리지만, 예수님을 의지하면 끝까지 갈 힘을 얻는다.
  2. 순간적 만족 vs. 영원한 가치 –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목표로 삼는다.
  3. 실패 후 좌절 vs. 실패 후 소망 – 내 능력으로 안 될 때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다시 의탁하고 일어설 수 있다.

결국, 자기계발조차도 하나님과 동행할 때 더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해진다.

예수님이 도와주시는 자기계발은 ‘성화(聖化)’이며, 영광을 위한 훈련이다.

  1. 자기계발의 목적이 바뀐다 →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노력한다. (고전 10:31)
  2. 능력의 원천이 바뀐다 →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빌 4:13)
  3. 과정이 변화된다 → 세상의 방식(경쟁, 자기중심적 목표)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겸손, 순종, 사랑)로 훈련된다. (롬 12:2)
  4. 열매가 다르다 →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면 성령의 열매(온유, 절제, 충성, 사랑)가 맺힌다. (갈 5:22-23)
  5. 끝이 다르다 → 세상의 자기계발은 결국 공허함을 남기지만, 예수님이 이끄시는 자기계발은 영원한 만족과 하나님의 영광을 남긴다. (요 15:5)

예수님이 도우시는 자기계발은 **‘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며,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12:16~19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먼저 제자들은 그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후,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본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16절).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 내신 일을 보거나 들은 무리는 그분이 그러한 표적을 다시 보이실 것을 기대하며 환호합니다(17~18절).

한편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른다며 분개합니다(19절).

교만한 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무리와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각각 어떠했나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와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하며 찬양했다.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한복음 12:13)라고 외쳤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정치적 왕으로 기대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보고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으며,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한복음 12:19)라며 불안해했다. 누가복음 19:39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답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무리는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바리새인들은 배척하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더욱 굳혔다.

나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은 무엇인가요?

내 감정을 주의해서 읽어야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내가 단지 기분 나쁘니까 너는 틀렸다.” “내가 좋으니까 맞다”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단순히 내 기분에 초점을 두고 기분 좋으면 맞고 기분 나쁘면 틀렸다라고 판단하면 결국 성경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 성경보다 앞서는 것이다. 내 감정이 모든 판단의 중심이 되어버린다.

내 감정이 뭐라고 하나님보다 더 우선되겠는가? 어이쿠 큰일날 일 아닌가?

감정은 변덕스럽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감정이 기준이 되면 진리를 왜곡하고, 관계를 망치고, 교만해질 위험이 크다.

“내가 불편하니까 상대가 틀렸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감정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야한다.

  •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마는."

감정은 참고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감정으로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감정은 기쁨, 사랑, 슬픔, 분노, 긍휼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신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감정은 변덕스럽거나 죄로 인해 왜곡되지 않으며, 언제나 거룩하고 완전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아가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나타났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를 보고 기뻐하셨고(창 1:31), 죄인이 회개할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한 깊은 긍휼과 자비를 가지신다.

하나님은 죄와 불의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가지신다. 그러나 인간처럼 감정적이고 불합리한 분노가 아니라, 공의롭고 정당한 분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슬퍼하시며,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감정은 거룩하며, 언제나 진리와 사랑 안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감정이 흔들리고 왜곡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감정은 진리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감정을 배우고 닮아가야 한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한다.

내 경험 내 가치관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먼저 확인해야한다.

우리는 쉽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기준 삼아 판단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험과 가치관은 한계가 있고,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 40:8)

감정은 변덕스럽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어떤 결정이 옳아 보이고, 기분이 나쁠 때는 같은 결정이 틀려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감정과 상관없이 항상 옳다.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이 있어도 그 끝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4:12)

내 기분,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분별해야 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 하시며 성경 말씀으로 이기셨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오직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8)

남을 쉽게 판단하면 안된다. 상대방의 상황과 마음을 모르면서 단정 짓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유지해야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교만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불완전한 판단을 하기 쉽다.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만이 중심을 아신다.

겉으로 보기에 잘못한 것 같아도, 그 사람의 사정과 내면을 모르면서 함부로 단정 지으면 안 된다.

판단이 아니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정죄하기보다 사랑과 자비로 대해주셨다.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대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도 완전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교만일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한다.

감정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다린다.

내 감정이 불편하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고, 내가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급한 판단은 실수를 낳는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다.

우리가 빨리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일수록, 더욱 기도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성령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모든 판단의 최종 목적이 사랑인지 확인해야한다.

내 판단이 정죄인가, 사랑으로 세우는 것인가 점검해야 한다.

우리의 판단이 사랑으로 세우는 것인지, 정죄하여 무너뜨리는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진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정죄와 비난의 태도로 하면 무너뜨릴 뿐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말하면 상대를 세우고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 우리의 판단도 사랑으로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정죄는 상대방을 낮추고 깎아내린다. 은혜 없이 율법으로만 판단한다. 자기 의로 인해 우월감을 갖는다.

사랑은 상대방을 세워준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함께 전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접근한다.

아무리 정확한 판단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사랑이 있는 판단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혼을 살린다.

나를 기준 삼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한다.

메시아 비밀 현대 사회는 고도의 정보 사회입니다.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19세 기에 이미 언론이 제4의 권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정보가 곧 힘이라는 것 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개인이나 집단의 성공은 자기 알리기'에 달려 있 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많이 알리시는 것이 유 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자신을 철저히 감추셨습니다. 군마를 탄 왕의 모습이 아니라 나귀를 탄 초라한 모습으로 예 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비 밀스러울 정도로 감추셨습니다. 그러면서 감추어야 알려지고, 낮아져야 높 아지고, 가난해야 부요해지고, 약해야 강해지는 '메시아 비밀'을 알려 주셨습 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메시아 비밀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알리고, 자기 뜻을 주장하 고, 타인을 누르는 모습으로는 절대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의 자녀들이 겸손하게 낮아지는 삶의 향기를 발할 때,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 나님나라를 엿보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오대식. 생명의말씀사

기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 많은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해방자로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들과 다르게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주님, 나 또한 세상의 가치관과 권위에 쉽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환경과 위치가 내 마음과 행동을 바꾸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권위와 힘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본받아 내게 주어진 직위와 역할 속에서 겸손과 섬김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셨듯이, 나 또한 내 안의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내 안의 죄를 먼저 돌아보며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내 생각과 감정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시고,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소서. 세상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참된 가치를 찾고, 주님의 겸손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나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내가 섣부르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따라 살게 하시고,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며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좁은 길을 걷게 하시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살렸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겸손히 살아가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모든 권위를 주님께 맡기며,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시며, 나의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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