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 가야바의 계략 11:45~53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일은 유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무덤 현장에서 그의 살아남을 목격한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으나 그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염려하며 공회를 소집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로마 제국에 반역의 빌미를 제공해 군사적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희생되고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50절).
그날부터 공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53절).
인간은 악한 계략을 꾸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 없는 아들의 죽음을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51~52절).
가야바가 말한 한 사람의 죽음과 민족의 구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나요?
가야바가 말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11:50)라는 말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예언하는 말이 되었다.
가야바의 본래 의도: 정치적 계산
가야바는 그 시대의 대제사장이었고, 로마의 눈치를 보며 유대 지도층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며 따르는 무리가 커지고 있었고, 이는 로마의 압박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로마가 개입해 유대 민족이 멸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요 11:47-48).
- 그래서 가야바는 "예수 한 사람을 죽이면 유대 민족 전체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 이는 단순한 정치적 셈법이었고, 가야바는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 유대 지도층과 민족을 보호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단순한 인간적인 계략을 넘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님의 관점: 구원의 예언
요한복음 11:51-52에서 요한은 가야바의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즉, 가야바가 무의식적으로 했던 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는 예언적 발언이었다.
-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이었다(요 1:29).
- 한 사람의 죽음(예수님)이 단순한 정치적 해결책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대속적 희생이 되었다(마 20:28).
-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로 모이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엡 2:14-16).
결국, 가야바는 인간적인 속셈으로 말했지만, 그 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십자가의 대속을 선포하는 예언이 되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제거함으로써 자신과 유대 지도자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계획을 예언하는 도구가 되었다.
-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면 유대 민족이 살 것이라고 했지만,
- 하나님은 예수가 죽음으로 온 인류가 영생을 얻도록 계획하셨다.
이처럼 인간의 악한 의도조차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다(창 50:20, 롬 8:28).
결론적으로, 가야바의 말은 정치적 술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선언하는 중요한 신학적 진리가 되었다.
예수님은 한 사람으로 죽으셨고, 그 죽음을 통해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영원한 구원을 베푸셨다.
인간의 계략조차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내가 순복할 일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계략은 무엇인가?
인간의 계략은 자기 유익을 위해 세우는 계획과 꾀를 말한다. 성경에서 인간의 계략은 종종 자기중심적이고,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계략조차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1. 인간의 계략은 보통 자기 보호와 유익을 위한 것이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이유도 단순한 종교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로마와의 정치적 갈등을 피하고 자기 자리와 권력을 지키려는 계략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과 이기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속이거나, 조작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2. 인간의 계략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 한다.
바벨탑 사건에서 인간들은 스스로 높아지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으셨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 없애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도 그들의 계략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사 53:10).
3. 인간의 계략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인간은 자신들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잠언 19:21에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이 아무리 치밀한 계략을 세워도 하나님의 뜻을 넘어설 수 없다.
결국 인간의 계략은 제한적이며,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하나님은 그마저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신다. 인간의 계략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께 내 길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잠 3:5-6).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략과 악한 의도조차도 사용하여 궁극적인 선과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순복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가야바의 경우처럼, 세상의 지도자나 강한 자들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신뢰해야 한다. 불의한 상황이 벌어져도 하나님께 맡기고, 내 방식대로 복수하거나 억지로 조정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고 맡겨야 한다.
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음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합리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실까?"를 생각해야 한다. 내 계획이 틀어지거나 방해받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더 크고 완전함을 믿고 인내해야 한다. 악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과 순종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가야바는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과 행동을 사용하여 더 크고 놀라운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다. 우리도 종종 내 생각이 옳다고 믿고 내 뜻대로 하려고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묻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마 6:10). 내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계략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마 16:24).
내 삶이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더라도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감당해야 한다. 내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내려놓고 복종해야 한다(빌 2:5-8). 내 뜻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심을 믿고 맡기고, 악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가야바의 말처럼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십자가의 원리가 내 삶에도 적용되기를 기도하자. 내가 내려놓고 희생할 때, 하나님의 큰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길이 힘들어도 결국은 영광스러운 길이다.
예수님을 잡기 위한 명령 11:54~57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내 놓고 다니지 않으십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로 가셔서 유월절이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십니다.
유월절이 되면 각 지방의 유대인들은 물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옵니다(55절).
성전에 모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 있는 곳을 신고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57절).
예수님을 잡기 위한 계략에 사람들이 동조하니,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의 표적이 됩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요 11:43-44). 이 소식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요 12:9, 17-18). 특히 유대 사회에서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메시아적인 표적으로 여겨졌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찾으며 그분이 진짜 메시아인지 알고 싶어 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구원의 절기였다.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에,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라고 외치며 그분을 왕으로 맞이하려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를 바랐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했다. 스가랴 9:9에는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 예언의 성취였고, 이것을 본 사람들은 더욱 그분을 찾고자 했다(요 12:14-15).
헬라인들(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요 12:20-21).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유월절은 단순히 유대인의 절기가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드러나는 시점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사이의 긴장감을 알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고(요 11:53), 예수님은 성전에서 그들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책망하셨다(마 21:12-13). 이러한 대립을 보려는 관심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게 만들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기적과 명성, 메시아적 기대, 예언의 성취, 영적 갈망, 그리고 종교적 대립 속에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참된 사명(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기대와 바람에 따라 그분을 찾았던 경우가 많았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나쁜 일에 동조한 적은 없나요?
‘나쁜 일’ 이란?
성경은 ‘나쁜 일’(악한 일)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으로 정의한다. 나쁜 일이란 단순히 사회적 기준이나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행하는 것
진리를 왜곡하는 것
거짓말, 속임수,불의를 정의롭다고 하는 것,죄를 가볍게 여기고 합리화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남을 속이거나 착취하는 것,미워하고 원한을 품는 것,필요할 때 돕지 않는 것,
자신의 양심을 무시하는 것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듣지 않는 것,마음에 찔림이 있는데도 억누르는 것,성령의 음성을 거부하는 것,
공동체 안에서의 ‘나쁜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사랑과 정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다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불의를 묵인하는 것: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조용히 넘어가는 것.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는 것: 사람들이 원하니까 동조하는 것.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 공동체를 지킨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가야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것도 공동체(유대 민족)를 보호하려 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결정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였다.
나쁜 일을 피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
양심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공동체의 흐름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진리를 말하는 용기를 가진다.
모든 것을 기도로 분별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직장, 친구 모임 등)에서 조화를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잘못된 일에 침묵한 적은 없는가?
누군가의 실수를 알면서도 관계가 깨질까 봐 묵인한 적은 없는가?
공동체의 이익을 핑계 삼아 거짓을 말하거나 불의에 참여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성경적 가치에 어긋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양심과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 순간적으로 양심이 찔렸다면, 성령께서 경고하신 것일 수 있다
. 의로운 결과를 낳았는가?: 공동체를 위한다고 했지만 결국 더 큰 죄를 만들었거나, 누군가를 희생시켰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한다. 성경에는 공동체 안에서도 불의에 맞섰던 사람들이 나온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께만 충성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외쳤다.
혹시 과거에 잘못된 일에 동조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앞으로는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 공동체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자.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겪는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법?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면 차갑고, 판단적이고, 무례해질 수 있다. 반면, 진리 없이 사랑만 있으면 모호하고 무책임해질 수 있다. 진리와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특성으로, 진리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사랑은 그 길을 따를 수 있게 돕는 힘이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방법 = 오직 예수님만을 강조한다.
진리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낙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말을 할 때, 그 말이 상대방을 어떻게 위로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때로는 직접적인 진리의 말보다 기도와 침묵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을 자제하는 것이 더 사랑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상대방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배경과 상황이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전하면, 그 진리는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다가간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진리를 전달하셨다.
진리를 말할 때, 내가 모든 것을 알거나 완벽한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진리를 나누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상대방이 방어적이지 않고 마음을 열 수 있다.
단지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으로 진리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진리가 실제로 내 삶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강제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인내와 존중을 가지고 상대방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을 두고 싹을 틔우는 씨앗처럼 다가갈 수 있다.
사랑과 진리를 동시에 전달하려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신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진리를 사랑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진리를 말하셨을 때, 그 말은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였고, 사랑이 없으면 그 진리도 전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상대방을 진리로 인도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기도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 그 진리가 사람들의 회복과 구원으로 이어지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그 진리를 통해 그들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지적하시지만, 그것이 그녀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하시되, 그 진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용서와 회복을 제공하셨다. 예를 들어, 가늠하다가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진리의 선언이었지만, 그것은 사랑으로 회복을 주는 메시지였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할 때 사람들을 존중하시고 그들의 처지와 마음을 배려하셨다. 예수님은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며,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셨고, 그 진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원의 진리였다.
예수님은 말씀뿐만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진리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나 규율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었다. 예수님은 행동으로 진리를 실천하시고,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나 외모에 대해 트집 잡고 비난하기 보다는, 우리의 내면과 진정한 필요에 대해 말씀하셨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악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지적하시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회개와 회복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쁜 일에 동조한 사람에게 진리와 사랑을 바탕으로 권면하셨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그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죄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회개와 구속의 길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나 베드로와 같은 인물들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사람에게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리시고, 그들이 돌아오길 바라시며 사랑과 은혜로 회복의 길을 제시하셨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쁜 일에 동조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권면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정죄하거나 버리시지 않으셨다. 대신, 사랑과 진리로 그들을 일깨우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 하셨다.
이 권면은 그들의 죄를 인식하고 돌아서도록 돕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말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질적인 필요, 즉 구속과 회복,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으며,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드럽게 인도하셨다. 그의 메시지는 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은혜와 사랑의 초대였다.
우리 안에 생명의 샘이 흐르게 되는 길을 제시하셨다. 이 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된 생명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외적인 행동이나 조건에 매이지 않고, 내면에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진정한 만족과 평안을 누리도록 초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와 죄와 악에 시선을 두지 말고, 본질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혼을 내지 않으시고, 잔소리 하지 않으시고, 죄책감을 가지게 하지 않으시고, 책망하지 않고, 다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이라고 하셨다.
"내 배에서 생명의 샘이 흐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물리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참된 평안을 얻고, 죄와 악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내면의 필요를 깨닫고,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끄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진리 안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길을 제시하며, 고통과 아픔 속에서 여전히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올 것이다." (요한복음 14:18)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결코 우리만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이끌어주신다는 깊은 위로의 말씀이다.
또한,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30)고 하시며,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짊어지는 부담과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가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지 말고, 그분에게 맡기고 의지할 수 있도록 초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제시해주신 진리의 길이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만 진정한 생명과 위로를 찾을 수 있음을 일깨워주신다.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는 단순히 말로만 끝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아픔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진정한 평안과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본체이시며, 그분 안에서만 우리가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말할 때,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셨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의 희생과 구속의 사역을 통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그 진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과 그분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예수님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분의 진리를 전하는 길이다.
즉, 권면 = 예수님이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은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참된 길과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향해 사랑과 진리를 기반으로 권면하셨다. 예수님의 권면은 단순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구원과 회복으로 인도하는 진리로서의 권면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와 연약함을 이해하시면서도, 사랑과 은혜로 그들을 일깨우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권면을 한다면, 그 권면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반영해야 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보이신 겸손과 인내, 진리와 사랑의 균형을 따라, 우리의 권면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프길 원하지 아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넘어지지 않길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지금도 내 안에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며 시도 때도 없이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예수님 앞에서 옳지 못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항상 말해주신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주신다.
우리는 그래서 상대의 문제에 대해서 경청하며,
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며 싸우고 사단과 전투해야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대항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죄를 직접 대항하면 같이 쓰러지기 일 수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면 자칫 잘못하면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인 진리라도,)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좀더 기도하며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라고 부드럽게 풀어나갈 수 있다.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과 소망을 찾을 수 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야 함을 알려준다. 문제나 어려움이 클수록, 그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지하며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자 인도자이시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모든 것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시선이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 차게 되어,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그분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다.
제자다운 제자 이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 '화재 대비 훈련'을 한 적이 있다. 전체 교역자를 모아 놓고 지역 구청의 소방대장을 초빙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시간이었 다. 이론 교육을 마친 후에는 모두 마당으로 나와 실제 체험 학습도 했다. 소 화기와 굵은 소방 호스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방향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등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때 소방대장이 화재 상황을 연출하고 실습자 를 찾았다. 모두 선뜻 나서길 주저하는데, 머리가 희끗한 한 사람이 걸어 나 왔다. 담임 목사님이었다. 담임 목사님은 소화기를 들고, 배운 대로 불을 끄 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소화 분말을 뒤집어쓰면서도 끝까지 불 을 다 껐다. 교역자들의 리더로서 본을 보여 주었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 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섬김과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제자 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마음을 살 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만 거룩하게 보인다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제자는 십자가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은 그런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테크닉 이 아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 다. 넘어진 제자훈련 넘어서기 / 김대조_국제제자훈련원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인간의 계략과 악한 의도조차도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계략을 통해, 어떻게 당신이 정치적 계책과 인간의 악한 마음을 사용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는지 깨닫습니다.
주님, 가야바가 의도한 대로 한 사람의 죽음이 민족을 구할 것이라는 말이 사실은 예수님의 대속을 예언한 것임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구속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구속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계략이나 의도에 휘말릴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신뢰하게 하소서. 내 힘과 계획이 아닌, 주님의 주권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악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따르며, 때로는 희생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임을 확신하고 따르게 하소서.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구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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