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보는 하나님 영광 11:36~40
유대인의 무덤은 대개 산지의 바위를 뚫어 만듭니다.
나사로의 무덤도 그러한 곳에 시신을 두고 입구를 돌로 막았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덤은 비극과 절망의 장소입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39절).
그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27절), 정작 현장에서 이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라고 다시금 확신을 주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말이 아닌 중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완전하게 나타내신 분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순종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세상과 구별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죄를 멀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고난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1:4)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거룩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며, 복음을 전하는 삶이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
당면한 문제 앞에서 내게 필요한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요?
"하나님, 나는 보지 못하지만 주님이 이미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상황 속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당면한 문제 앞에서 필요한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예수님의 기도와 같은 태도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응답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문제의 크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26)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셨고, 나를 통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을 증거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있는 어려움도 결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신 예수님의 명령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히 선포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선포할 때,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할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 나는 보지 못하지만 주님이 이미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다.
저 나사로는 사실 “나” 혹은 “너” 이다.
나는 무덤에서 죽었다가 예수님께서
“정빈아 나오라!” 라고 외치셔서 그 말에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바치고 순종하고 따랐기 때문에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신에게 예수님께서는 “OO아 나와라!” 라고 천국의 한 자리에 초청하고 계신다.
그 음성을 당신은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이라도 회개하기 좋을 때이니 즉각 회개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길 간절히 바란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르신 것처럼, 오늘도 나와 너를 부르시고 계신다.
예수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두드릴 때, 나는 즉시 순종하고 있는가? 아직도 죽음의 냄새가 나는 무덤 속에서 머물며,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정빈아 나오라!"라고 부르실 때, 나는 그 부르심을 듣고 믿음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OO아 나와라!"라고 초청하신다. 그 음성을 외면하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자. 그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15)
나에게 당면한 문제는 이제 거룩해야할 문제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유혹들, 오직 예수의 길,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지만 내 육체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로마서 7:22-23)
내 마음은 주님의 법도를 원하나 내 육체는 끊임없이 갈망하며 죄를 탐닉하길 원하고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길 원한다.
내가 인간으로서의 육신의 한계를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예수님을 붙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육신과 영이 오로지 완전한 천사들도 등 따숩고 배부르니까 타락천사 루시퍼가 되었지 않는가?
이사야 14장 12절에서는 "루시퍼" 또는 "계명성"(새벽별)을 언급한다. 여기서 루시퍼는 "빛나는 자" 혹은 "새벽을 밝히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 구절은 바벨론 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후에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타락한 천사인 루시퍼로 해석하게 된다.
12 너 아침의 아들 1)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루시퍼는 후에 사탄과 동일시된다. 사탄은 히브리어로 "대적자" 또는 "고발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인데, 이는 사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대적하고 고발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계명성 = 루시퍼 = 사탄
에스겔 28: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눅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가장 높은 천사장이었는데 이 육신의 고난이 아마 내가 교만해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셔서,
내가 이 육체 안에서 거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지 않을까?
나는 만약 천사와 같이 거룩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었으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까?
영이 이미 더럽혀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
내 마음과 영과 혼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은 간악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이 육신의 한계가 없었다면, 하나님께 의지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방종하며 방탕하며 내 기쁨을 탐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내 육신의 한계를 알게하신 하나님께 다시한번 깊은 마음으로 순종하며 감사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심지어 가장 지고하고 높은 천사장으로 창조된 천사마저도 타락하는 것인데, 그 전사가 사단 마귀이고 사탄이다,
그 마귀의 목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하고, 하나님께서 의도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거짓과 유혹으로 인간을 죄로 끌어 들이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사람들의 믿음을 시허맣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사탄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단 마귀는 마지막 날에 불못에 던져저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지금도 사단마귀는 나에게 갖은 유혹과 이 세상이 전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도 알지 않는가? 저 너머 천국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끝이라고 믿고있다면, 평생 왜 태어났는지?, 나는 누구인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지? 갈망하며, 갈급해하며, 자기 영혼을 스스로 탐닉하며 갉아먹다가, 그렇게 죽을때 비참하게 소리지르고 죽고싶지 않다고 고통 속에서 당신은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오직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갈 것인지, 말지.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마저도 존중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섭리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선언하고 선포하고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정확하고 정미하고 정교한 하나님의 때만을 기다리며 간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사명을 내가 이뤄보도록 간절히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응답 11:41~44
예수님의 기도와 응답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말)를 ‘항상’ 들으십니다(41~42절).
둘째,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이유는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42절).
셋째,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십니다(43절). 기도는 때로 큰 소리로 해야 합니다.
넷째, 기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납니다(44절). 이와 같이 믿음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1:41-42)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셨다. 아직 기적이 일어나기 전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확신하고 계셨다. 또한, 예수님은 이 기도가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밝히셨다. 즉, 나사로의 부활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고,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이루어진 믿음의 선언이었다.
- 기도하는 대상 : 하나님 아버지
- 기도하는 이유 : 감사와 아버지께서 보내심을 믿게 하려 함.
- 기도하는 방법 : 큰소리로 외치심.
- 기도하는 결과 : 하나님의 기도 응답 받음,
내가 믿음을 가지고 응답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드릴 기도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선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응답하셨음을 믿고, 그 응답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 내가 간구한 것, 간구하지 않은 것, 감사한 것, 감사하지 않은 모든 것, 나의 모든 바램과 소망 뜻, 어차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될 것이니, 오직 하나님 뜻대로 이미 하셨음을 내가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감정에 지고, 마귀에게 패배하고, 화내고 성내고 짜증내고 인격 함양이 덜 되었지만,
이웃 사랑도 실천 못하는 것 같고,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미 내 모든 길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계획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굳건히 믿습니다.
기도 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알겠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 11:24)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셨고, 나를 통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것 처럼,
내 삶에 있는 모든 어려움도 결국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도구가 될 줄을 믿습니다.
지금은 내가 미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오해해서 원망하고 사단 마귀에게 질 지 언정,
예수님께 피하고 승리하고 나의 삶에 있는 모든 어려움도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히 선포하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죄와 사망의 절망과 자괴감 죄책감 자기정죄 자책, 두려움과 불안, 자존감을 낮추는 공격, 자기 연만민 절망, 거짓 유혹, 정죄와 비난에서 벗어나서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침묵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선포하며,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께서 이미 개입하시고 섭리 안에 있으시며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는 보지 못하지만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심을 믿습니다. 일하심을 믿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마귀의 거짓된 유혹과 정죄에 속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마태복음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신다. 그분은 슬피 우셨고 분노로 가득하셨다. 나사로 때문에 우셨을 리는 없다. 잠시 후에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고 노하셨을까? 그분은 사랑하는 인간과 창조 세계를 파멸에 빠뜨린 죄와 죽음에 격렬히 분노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밝히신다. 따라서 그분이 죽음에 격노하신 데는 큰 의미가 있다. 창세기에 그 근거가 나와 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설계에 들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늙어서 약해지고 병들어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기껏 죽음으로 끝날 사랑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지도 않았다. 죽음은 침입이며, 인류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등진 결과다. 지금 우리는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지만 본래는 이런 세계에 살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멸의 ‘성자 하나님’이 세상으로 보냄받아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 되어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꺾으셔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다(히 2:15).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완전히 갚아 주심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사망의 권리와 세력도 꺾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기독교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 삶을 무한히 더 나아지게 하는 것뿐이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 팀 켈러_ 두란노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만드실때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설계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와 마귀의 꾀임에 인간이 넘어간 것에 대한 질문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고 복잡한 문제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선택하길 원하셨다. 자유 의지가 없다면 사랑은 진정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선악과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따를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그 선택을 올바르게 하는 과정은 성장의 일부이며, 하나님은 인간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선택하기를 원하셨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중요한 시험이었던 셈이다.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루시퍼)였고, 그가 타락하여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귀의 꾀임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존재와 그의 악행이 하나님에게 허락된 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죽음은 현실이 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님을 통한 구속은 바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생명과 구속을 가져오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면서도, 타락 이후에는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죽음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이루어 내셨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고, 그 선택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다. 선악과는 이 자유의 상징이었고, 그 선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타락 후에는 구속의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삶의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나사로를 부르신 그 권능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OO아 나와라!"라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소망을 주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해 주세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주님의 능력과 영광을 믿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유혹을 떨쳐내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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