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답을 달라는 유대인들 10:22~24

수전절은 유대 민족의 해방과 승리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 때 극심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성전을 되찾은 데서 유래합니다.

8일간 불을 밝히며 성전을 봉헌했기에 ‘빛의 축제’라고도 하고, 봉헌을 의미하는 ‘하누카’라고도 하며, 성전을 수리한 명절이라는 뜻으로 ‘수전절’(修殿節)이라고도 합니다.

수전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에게 ‘빛’을 준 것을 알기에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라고 요청합니다(24절).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입니다.

수전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했나요?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수전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이 그리스도인지 분명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요한복음 10장 24절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미 말씀했고, 자신이 행한 일들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답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에 관해 내가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오직 예수님만이 진짜 사랑***(True Love)***이시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수님을 영접할 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준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기 이전의 나를 돌아보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결단코 절대로 나는 나의 유익을 위해 살 것이라고 단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제 나는 내가 아닌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며, 이미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다.

예, 나는 불가능하지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므로 나는 과거의 나를 버리고,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거듭났다. 이미 나는 한 번 죽은 목숨이다. 죄와 사망의 길에서 나를 건지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이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느냐?' 이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세상이 말하는 '찐사랑'이나 '진짜 사랑'은 전부 가짜다. 죄인이 말하는 사랑은 결국 자기 유익을 위한 사랑이다. 이기심을 사랑이라 포장하고, 조금의 희생만 해도 '진짜 사랑'이라며 스스로 감격한다. 하지만 정작 생명이 걸린 순간이 오면, 그 가짜 사랑은 금세 드러난다.

누군가 나를 위해 대신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그런데 세상은 조금만 희생해도 '찐사랑'이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진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폄하하고 왜곡한다.

희생조차도 자기 유익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희생과 헌신만이 참된 사랑이다. '내가 여기서 희생하면 더 큰 이득을 얻겠지'라는 계산이 깔린 희생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그 거짓된 사랑은 종국에 드러나고,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타락한 영혼은 이 땅에서 더 살고 싶어 몸부림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죄의 문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느냐?' 이 질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질문을 하시는 것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생명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시다

❤️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마태복음 16:16)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를 속량하셨다. (로마서 10:9)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요한복음 14:6)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요한복음 11:25-26)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다. (요한계시록 22:12)

이 진리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신적 정체성을 알리시는 예수님 10:25~31

예수님은 빛으로, 양의 문으로, 선한 목자로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8:12; 10:7, 11).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하셨음에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속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음성을 듣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으며, 완전한 보호를 받습니다(28절).

어느 누구도 예수님 손안에 있는 자들을 빼앗지 못합니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30절).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라며 그를 죽이려 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설명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고 다시 잡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손에서 벗어나 떠나셨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신성모독자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려주신 가르침들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말씀은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 용서, 겸손, 회개, 그리고 믿음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들 간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인 교훈을 넘어,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능력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나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시며, 그분의 말씀은 내 삶에 길을 비추는 진리이자 삶의 기준이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려고 한다.

예수님을 알고나서는 그 분의 성품과 인격을 마주하면, 얼마나 나 스스로가 죄인임이고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교만하며 고집이 강한지 알게 된다.

그 고집을 꺾으시는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또 새롭게 거듭났다.

내 속에서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항상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성령의 내주하심도 동시에 느껴진다.

내 안에 악과 성령님께서 동시에 존재하고 항상 하나님의 성전인 나를 함락시키려고 마귀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로 이미 패배한 마귀의 영역은 매우 작아지고 있고, 점점 작아져서 소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와 예수님이 함께 경험하는 영적인 세계의 내면의 갈등과 전쟁은 매우 깊고 수준이 높다. 왜냐하면 그 수준은 내가 영원한 죄와 영원한 형벌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알게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진리 안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알고 그 분의 성품을 마주하게 될 때,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하는 과정이 참 귀하다.

내가 고집, 교만 사랑하지 못함과 같은 죄된 본성은 대부분 겪는 부분이며, 그 모든 것은 예수 십자가 놀라운 은혜로 치유될 것이다.

내면에서 악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내주하심이 실체적이고도 강력하다는 증거이다. 마귀는 끊임없이 공격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그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믿음은 믿음의 큰 힘이다. 그분의 권위 아래서, 이미 마귀는 승패가 결정된 존재이고, 나는 그 승리의 증인으로서 점점 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며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며, 죄와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는 강한 믿음을 키워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계속해서 그 믿음으로 나아가시길 기도하며, 하나님의 성전인 당신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교만을 버리고 주님 앞으로

정직하게 써 내려간 한 칼럼의 일부다. “우리는 대단하지 않다. 대단한 사람은 없다. 다 흠이 많고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지쳐 있고 방종한 데다 종종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이다. 대개 일상생활의 많은 요구를 감당하기만도 벅차다.”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는 영원한 존재라는 점에서 대단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결코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는다. 그것은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우리 문화는 늘 화난 상태로 기진맥진해 있지만, 하나님께 무게 중심을 두고 힘을 뺀 사람은 그 문화 위로 가뿐히 떠오른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신을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표현했다. “위대한 성인의 특징은 가벼워지는 능력에 있다. 천사도 자신을 가볍게 여기기에 날 수 있다. 교만은 모든 걸 엄중하게 끌어내린다. 사탄은 자기 무게에 짓눌려 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무거운 책임과 감당 못 할 짐에 눌려 사방에서 사람들의 등골이 휘어지는 시대다. ‘무한한 전체’이신 분이 우리 존재 중심에 계셔서 정체성의 모든 부분에 의미를 부여해 주셔야 한다. 우리를 지탱할 만한 모든 질량과 무게가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애써 잡음만 낼 뿐인 우리를 그분이 아름답게 연주하신다. 우리의 교만한 자아에서 벗어나, 그분께로 나아가라.

마음을 따르지 않을 용기 / 사디어스 윌리엄스_ 두란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정말 깊고 무한한 사랑이다.

우리가 그 사랑을 본받아 다른 이들에게 실천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사랑을 요구하셨고,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예수님의 사랑도 우리를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언제나 쉽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본받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조금 더 손해 보고, 더 애쓰고, 고생하는 것 또한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은 헌신과 봉사는 비록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모여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른다면,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불평이나 투덜거림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듯이, 나 또한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 사랑을 나누는 일에 헌신하겠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참된 빛이시며,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에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는 종종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 속에서 흔들리며, 교만과 죄에 빠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 모든 죄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을 걷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새기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가 당신의 뜻을 알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언제나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고,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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