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에덴 22:1~2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요한계시록의 새 에덴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서 창세기의 처음과 만납니다.

본문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나, 본문의 에덴 이미지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넘어섭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지만, 본문에는 생명나무만 등장합니다.

죄악의 흔적이나 사탄도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악의 모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본문의 에덴은 완성된 에덴이요 새로운 에덴입니다.

새 에덴에는 생명수 강이 흘러넘칠 것입니다(1~2절).

‘생명수’는 성령을 상징하며, 영생과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생명수는 성령이 주시는 새 생명,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놀라운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은 새 에덴과 풍요로운 생명의 축제가 영원토록 펼쳐지는 곳입니다.

생명수가 넘치는 새 에덴의 모습이 내게 주는 위로나 소망은 무엇인가요?

생명수가 넘치는 새 에덴의 모습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과 은혜의 상징이다.

새 에덴의 모습은 나에게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이 생명수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고, 마음의 고통과 죄의 흔적까지도 깨끗이 씻기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소망하게 한다.

이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통이 언젠가 모두 사라질 것이다.

새 에덴은 영생을 약속하신다. 새 에덴에는 결핍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것을 채우시고 다스리신다. 이 소망은 우리가 일시적인 고난을 이겨내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는 힘이 된다.

새 에덴은 하나님과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생명수가 흐른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 은혜가 쉼없이 우리에게 공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며, 그분과 함께하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생명수가 넘치는 새 에덴은 나에게 비전을 보여준다. 현재의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넘어질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새 에덴으로 초대하시고, 천군천사가 천국문 앞에서 기다릴 것이며, 영원한 만족을 나에게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약속은 나의 믿음을 더욱더 견고하게 하시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

새 에덴의 모든 것은 단순한 미래의 환상이나 허황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능력을 떠올리게 하는 위로이면서 영원히 변치 않는 소망의 근원이 된다.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사랑합니다.

나에게 위로가 되시는 십자가 사랑과 미래와 비전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뵙는 그날 22:3~5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도는 하나님 얼굴을 대면합니다(3~4절).

이는 성도의 위대한 소망이 실현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완전하게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은 위대한 복이요, 구원과 영생의 절정이며, 성경의 모든 계시가 완성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는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을 덮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성도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소유, 신분, 보호를 뜻합니다(4절).

성도는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주님을 뵐 소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요?

삶의 목적과 방식은 사람의 내면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행실로 나타나며, 행실은 곧 마음의 상태와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주님을 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주로 자신이나 세속적인 성취에 머물러 있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하며, 영원한 관점을 가지지 못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불확실함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종종 경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이며,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고난을 만났을 때는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기도 하며, 고통을 피하려는 세속적인 방법에 의존하려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인생의 끝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를 깨닫지 못한 채 삶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려 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관계 속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용서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관계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때, 깊은 관계 회복과 화해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반면, 주님을 뵐 소망이 있는 사람은 모든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자신이 맡은 사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헌신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의 준비로 여기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합니다.

말씀을 따라 선과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애씁니다. 사랑과 겸손, 섬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개와 성화를 통해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믿음으로 그것을 견뎌냅니다.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붙들고 감사와 인내로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사랑으로 대하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나눕니다. 자신보다 이웃을 섬기는 삶을 통해 점점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우리는 주님을 뵐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변화와 성숙을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영원한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던 때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때로 목적 없이 방황하고, 순간적인 즐거움이나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감싸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손해처럼 느껴질지라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종은 우리의 교만과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때, 그 사랑은 우리를 통해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화평과 희락을 맛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소망에 근거한 선택

요한계시록에는 두 개의 도성이 나옵니다. 바벨론(로마)과 새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당시 로마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우상화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님이자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이 만든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에서 맹수와 싸우게 했습니다. 이 원형 경기장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 명소입니다. 등불을 환하게 켜고 야간 경기를 진행했을 정도로, 그 당시 호사스러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비참하게 멸망할 바벨론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님만 따랐습니다. 천상의 새 예루살렘에서 참자유와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실 분을 택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 중 어느 도성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바벨론과 같은 사탄의 권세에 담대히 저항해야 합니다. 절망스러운 땅의 현실을 하늘의 안목으로 보면서, 땅 위의 모든 악한 권세가 심판당할 것임을 알려야 합니다. 그 심판의 근원이 하늘에 있음을 보여 주며 살아야 합니다. 최후 승리는, 종말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신실하게 견디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왕대일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을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터전에서 살고 싶습니다.

하늘 시민권을 얻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희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신실하고 지존하시며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돌립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게 오늘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옆에서 중보하시며 내 안에서 살아계시며 예수님의 향기를 전할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내가 못할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점을 또 회개합니다.

1분 1초라도 당신을 외면할때 회개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당신을 향한 믿음은 항상 켜져있게 도와주세요,

끄면 꺼지는 스위치 같은 믿음을 제하여주시고, 내 안의 스위치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산산조각 부숴주시길 바랍니다.

항상 켜져있는 믿음의 승리자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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