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21:1~4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성도의 최종 소망은 영원한 본향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영원한 나라에 대한 세 가지 환상이 펼쳐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에덴’입니다(21:1~22:5). 천상의 계시는 초월적이며 인간 이해를 뛰어넘기에 많은 상징과 은유가 사용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 대조됩니다(1절).
새롭게 되기 위해 옛 창조의 파괴가 수반됩니다.
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변화일 것입니다.
13장에서 바다는 악의 세력의 모체로 등장했는데(13:1~10), 바다도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1절).
새 예루살렘은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 같습니다(2절).
이는 어린양의 아내가 영광 가운데 존재하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19:7).
눈물도 고통도 없고, 죄의 저주가 사라진 천국에서 성도는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잠시 머무는 이 땅에 있나요, 영원한 본향에 있나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궁극적 관심이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권능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권세 아래 있는 성도들이다. 나의 삶의 초점은 영원한 본향도, 잠시 머무는 이 땅도 아니다. 나의 모든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성격으로, 진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수행, 철학, 마음공부 등 다양한 길을 걸어봤고, 나름의 지식과 인생 철학도 있었다. 이 땅에서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으며,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내 삶에 만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강렬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가 나를 변화시켰다. 그 순간,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 하나님의 찬송임을 깨달았다. 이 목적은 내 삶의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에 불과하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달려갈 뿐이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드리는 것만이 나의 관심이다. 영원한 본향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곳이기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국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이 땅도 영원한 본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
물론, 죽음 이후의 본향과 이 땅을 나눈다면 당연히 영원한 본향이 우선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당장의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본향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된다.
잠시 머무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있다. 사랑을 배우고, 시험과 환난 속에서 연단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져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우리는 하늘 소망을 품고, 부활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천국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간다.
사단은 우리를 속여 이 땅을 영원한 본향처럼 여기게 만들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곳은 천국이 될 수 없다. 이 땅에서도, 영원한 본향에서도 우리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 땅에서도 하늘의 것,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만물을 새롭게 하심 21:5~8
이기는 자는 무엇을 상속받게 되나요?
창조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오염된 우주를 새롭게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초월적 영역이기에,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무(無)로부터의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듯 과격한 변화가 수반될 것입니다.
‘이기는 자’(7절)는 사탄의 현혹과 핍박을 견딘 자를 가리킵니다.
이기는 자는 천국을 상속받지만, 불신자는 사탄과 함께 둘째 사망인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이 됩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천국 소망을 심어 줄 수 있을까요?
일단 나부터 회개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주변에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 후에, 천국 소망은 삶과 가치관 속에 복음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고, 천국이 단순히 미래의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삶으로 보여줘야한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그래서 나는 말이 많다.
천국 소망을 삶으로 증명되어야한다. 안 믿는 사람들이 내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은혜를 느끼도록 해야한다.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평안을 잃지 말아야한다.
물론 그 상황때문에 또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간증은 또 누군가의 상처가 될 수 있기 떄문이다. (예: 홍수나서 나는 살았는데 천명이 죽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그런것이다. 그럼 죽은 사람들은 상처받을 것이기때문.)
그래서 침착하고 분별력 있게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를 현명하게 전달해야할 것이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
천국은 단지 죽음 이후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이 임하는 현재로 설명된다.
천국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면 천국이 시작된다.
천국과 지옥을 논리로 이성적으로 성경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그들의 질문과 관심을 진지하게 듣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편이 낫다.
너는 행복이란게 어디서 온다고 생각해? 지속되는 평화와 만족이 있다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으로
좀 진지한 질문은 모든 영적인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영적인 갈급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군든지 영적으로 평온하고 샬롬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욕구이다.
현실적으로 불안, 상처, 공허함에 대해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영적인 빈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울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뭐가 제일 걱정인지?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가장 힘든지? 서로 나누고 정답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을 짚어주면 좋을 것 같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삶의 어려움과 함께 덜어주고 짐을 서로 나누어 지고, 형제 자매들을 도와야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준다.
천국은 억압적인 규칙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준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하면, 천국을 바라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천국은 단순히 미래에 기다리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니뫄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사랑은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히 주시고 있다.
어차피 내가 하는 것도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내가 전도하고 천국 보내야한다는 마음을 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다음 세대가 천국 소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약속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라면서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관심을 잃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라고 진단했다. 또한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라는 예언자적 경고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천국에 무관심해진 것은, 교회가 천국에 대한 성경적 지식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아서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천국이나 마지막 때에 대해 막연한 영적 황홀경이나 신비로운 상태쯤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도 보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실재다. 이 땅에서의 슬픔과 고통이 성도에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뤄질 삶을 기대하며 일상에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께 문화 명령을 받아 땅을 통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창 1:28), 첫 사람인 그의 타락으로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우리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통치하게 된다.
기독교 팩트체크 / 안환균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존하신 당신을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찬송드릴 감격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 당신께서 주신 시간과 재물 모든 것을 귀중히 사용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도록 제게 지혜를 주시고
사랑과 거룩 지킬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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