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함 2:11~14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자 이방인과 식사하던 자리를 떠났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이들은 유대의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을 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과거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 없이 한 가족이 됨을 경험했습니다(행 10장). 그럼에도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해 외식했고, 그 결과 바나바까지 외식(위선)에 빠지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의 진리대로 행하지 않자, 바울은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복음이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안디옥에 이른 베드로를 바울이 강하게 책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선으로 외식함.

내가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성경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많은 각오와 결단 선택 포기가 필요하다. 어느 무엇이든지 누구에게든지 언제든지 환경에 구애받지 아니하며, 어떤 것이라든 지 묶이지 않고 나는 주님의 길을 가겠다. 십자가 좁은 문으로 가겠다. 포기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휩쓸리지 않고 내 길을 갈 것이다. 말씀을 읽고, 선포하며, 찬송하며, 예배드릴 것이다. 내가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에 결코 후회가 없으니 이 한몸 던지고 바쳐서 주님 은혜대로 살리라.

이신칭의 은혜 2:15~21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이 ‘이신칭의’ 진리가 베드로의 외식이 드러나는 문맥에서 선포됨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의미와 더불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교회론적’ 의미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20절). 베드로가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를 떠난 것은 다시 율법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요, 하나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일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1절).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고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이신칭의는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나요? 모든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성도는 차별하지 않고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내가 버려야 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나의 행위는 은혜 받은 것의 증명일 뿐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영광만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발견할 수 있는 율법주의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와 자유보다는 규칙과 의무를 강조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 행위나 선행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 규칙을 지킨다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이다. 율법을 지켰으니 정죄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나는 했는데 너는 왜 못해 라는 마인드이다.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않으리라 하셨다. 사랑과 은혜가 관계의 중심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나를 더 사랑하실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이 세상의 모든 별을 합친 갯수보다더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책감을 만들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려움에 기반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려움이 아닌 자유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낸다. 하지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할 때 온전히 율법주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의 그릇을 십자가 은혜로 산산조각 내어주시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릇으로 새것으로 바꾸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 태어난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기뻐합니다. 세상과 육신에 속한 일을 혐오합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성경에서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이전에는 그런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놀라워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집니다. 자연 전체도 달라졌으며, 새로운 세상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하늘과 땅에 새로운 놀라움이 가득 차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생겨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겨나고 이전에는 품지 못했던 연민을 원수에게 품게되며 모든 인류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생겨납니다. 한떄 집착했던 죄가 영원히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변화되는 중이며, 실패할 때마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가면서 죄를 덜 자발적으로 덜 짓습니다. 새 자아는 여전히 죄를 미워합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새 피조물 입니다. 새 피조물은 하나님의 의지로 구상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놀라운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

유대인들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날마다 피비린내가 났고, 유월절 같은 절기 때는 동물의 피가 강같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달라졌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의인이 되는 길이라 여겼기에 ‘율법 준수 경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대회를 가증스럽게 여기셨습니다. “너희가 가져오는 제물은 냄새도 맡기 역겹다. 입술로는 내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천리만리 떨어져 있구나.”라며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재고 계셨습니다. 때가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더는 지켜지지 않으면 하나님 자신이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구덩이에서 건지셔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의의 새 옷을 입혀 주셨기에, 이제 그 옷을 입고는 다시 진흙탕 속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탕자처럼 돼지와 사료를 나누어 먹던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등을 떠밀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받았다는 믿음, 의로워졌다는 믿음, 하나님이 나를 덫에서 빼내 주셨다는 믿음이 있어야 예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 외에 죄인이 의롭게 될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만이 참된 회복을 경험합니다.

왜 구원인가? / 조정민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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