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위대한 교육 개혁가 존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는 이미 1631년에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천국」(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이란 책을 발표하였는데, 그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나님과 연합된 선택된 자들에게는 세상과 영광, 행복과 즐거움이 아무 쓸모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17세기 초반에는 번연의 글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영어 훈계서들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알레고리, allegory
- 표면적인 이야기나 묘사 뒤에 어떤 정신적·도덕적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비유. 가령, 오웰(G. Orwell)의 `동물 농장'은 독재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은 소설임. 풍유(諷諭).
그러나 크리스천이 넘어지는 것은 다시 일어서기 위함이요, 허덕이고 움츠리는 것은 더 잘 싸우기 위함이다....
만약 믿음(Faithful)이 진정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표상이라면, 그는 마치 북극성과 같이 한결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만약 선 혐오 경(Lord Hate-good)이 믿음에게 정죄를 내린다면, 그가 허황된 위세를 부리고 쓸데없이 큰소리를 쳐야만 한다. 그런 인물을 묘사하는 데에 미숙한 면은 전혀 없으며, 예술적으로 성실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모든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1부
1. 저자의 수감(收監)과 꿈 - 크리스천이 죄를 깨닫고,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고 복음의 인도로 그리스도께로 향한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행 16:30, 31)...
좁은 길로 가라
2. 크리스천의 순례 시작 - 고집쟁이는 동반 거부 - 유순은 가다가 포기...
낙심의 늪에서 유순은 포기
도움이 크리스천을 빼내줌
3. 크리스천과 세속 현자의 대화...
도덕 율법 예의
세속 현자의 그릇된 충고
전도자의 하나님의 말씀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 12:25).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니(마 12:31; 막 3:28) 믿음을 버리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요 20:27).
그자의 권고들 중에서 당신이 전적으로 물리쳐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당신을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한 점.
둘째, 당신이 십자가를 꺼려하도록 유도한 점.
셋째, 당신으로 하여금 사망의 골짜기에 이르는 길로 가도록 유혹한 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4. 크리스천이 좁은 문에 도착하여 친절한 영접을 받다.
“제가 지금 여기로 들어가도 될까요? 비록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쓸모없는 존재이지만 문 안에 계신 분이 저를 긍휼히 여겨 받아 주실 수 있을는지요? 만일 당신께서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면 저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영원한 찬양을 드리겠나이다.”
선의: “그런데 어째서 당신 혼자서만 이곳에 왔습니까?”
크리스천: “나의 이웃들은 어느 누구도 내가 느끼고 깨달았던 멸망과 진노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 크리스천은 해석자의 집에서 즐겁게 환대를 받는다.
인내와 욕망
해석자: “아니,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습니다. 즉 다가올 세상의 영광은 영원 불멸의 것이지만 현세의 허황한 영광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이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먼저 가졌다고 해서 인내를 비웃을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나중에 좋은 것들을 차지하게 되는 인내가 욕망을 비웃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좋은 것을 차지하는 사람은 결국 나중에 올 사람에게 자리를 남겨 주어야만 하지만, 나중에 차지할 사람은 다가올 좋은 것들에 대한 희망이 있고 마침내 차지하게 되었을 때는 뒤에 올 사람이 없으므로 아무에게도 넘겨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처음에 자기 몫을 차지하는 사람은 그것을 소비할 시간이 많아서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게 되지만 나중에 차지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보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어느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크리스천: “이제 저는 눈앞에 보이는 이생의 것들을 탐내는 것보다는 다가올 세상의 복락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해석자: “당신은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목전에 보이는 것들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고후 4:18)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현세의 욕망과 육욕은 서로 지극히 가까운 사이이므로 인간은 금세 친밀하게 되지만 내세의 복락과 육욕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늘 서먹서먹하고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벽난로의 불
끄려고 마귀가 쉴새없이 물을 부음
뒤에서 그리스도께서 쉴새없이 기름부어주심
불 안꺼짐
절망의 감방
그 남자: “나는 내 자신의 정욕을 위해 그를 새로운 십자가에 다시 한 번 못박은 죄인입니다(히 6:6). 나는 그분
그분의 인격을 경멸했고(눅 19:14) 그분의 의로우심마저도 경멸했습니다. 또한 그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였습니다(히 6:4-6; 10:28-29).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모든 언약으로부터 스스로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써 결국 모든 은총을 잃고 버림받게 되었고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맹수가 나를 집어삼킬 듯한 위협, 확실한 심판과 원수로서 나를 태워 죽일 듯한 가혹한 분노의 위협과 두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크리스천: “도대체 어떤 일로 인해서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그 남자: “이 세상의 정욕과 쾌락과 헛된 부귀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향유하면 많은 즐거움과 행복을 얻게 되리라고 그때는 믿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무시무시한 독충들이 되어 나를 물어뜯고 삼켜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돌이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남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저의 회개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며 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다시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저를 이 철의 감방 안에 가두셨으니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저를 쇠창살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지요. 아! 영원, 영원, 영원한 고통! 영원토록 내게서 떠나지 아니할 이 무시무시한 고통들을 내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해석자: “이 사람의 비참한 불행과 고민을 잘 기억하여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교훈으로 삼으십시오.”
6. 크리스천이 십자가에서 그의 짐을 벗다.
그때 나는 꿈속에서 크리스천이 올라가고자 하는 길 양쪽에 높은 울타리가 둘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울타리의 이름은 구원(Salvation)이었다(사 26:1).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크리스천은 이 길을 달려 올라가는 동안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가서 마침내 한 언덕받이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십자가(Cross)가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아랫부분에는 무덤(Sepulchre)이 입을 딱 벌린 채 놓여 있었다. 크리스천이 십자가 위로 막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어깨로부터 짐이 풀어져 등에서 벗겨지더니 계속 미끄러져 내려와 마침내 무덤의 입구에서 그 속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본 크리스천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홀가분함과 즐거움에 넘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괴로움을 당함으로 내게 평안을 주셨고 주께서 목숨을 버리사 내게 영생을 주셨나이다.”
십자가 앞에 이르자마자 그토록 무거웠던 짐을 벗어 던지고 몸이 홀가분하게 된 크리스천은 무척 놀란 모습으로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신기하다는 듯이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기쁨에 넘쳐 머릿속의 샘물이 터지면서 눈물이 흘러 내려와 두 뺨을 촉촉히 적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서 있었다(슥 12:10).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광채를 발하는 세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평안할지어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중의 첫 번째 사람은
7. 깊이 잠든 천박, 나태, 거만과 만나다 - 허례와 위선의 경멸 - 곤고산에 오르다
천박 나태 거만
곤고산
위험 멸망의길
겁쟁이 불신
8. 크리스천이 사자를 무사히 지나 아름다움이란 집에 도착하다.
경계
신중
분별 경건 자애
부끄러움과 함께
싫증을 함께 느끼곤 하지요.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5-16).”
분별: “그 밖에도 좋아하던 것들이나 친밀한 관계를 맺던 사람들에 대하여 미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크리스천: “다소의 미련이야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 의지에 크게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뿐만 아니라 고향 사람들 모두가 크게 희열을 느꼈던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향락들을 돌이켜볼 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나의 고통이요, 슬픔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나 자신의 일들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결코 그런 것들을 생각지도 않고 더구나 선택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종종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뜻밖에도 내가 가장 미워하는 악한 일들이 나를 따라다니곤 합니다”(롬 7:19).
분별: “그런 괴로움들이 이전에는 당신께 당황과 혼란을 가져다주었지만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지 않으십니까?”
크리스천: “예, 좀처럼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일들이 내게 일어나는 시간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귀하고 값진 시간들이지요.”
분별: “때때로 당신을 괴롭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당신에게서 떠나 버렸다고 느껴질 때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크리스천: “예, 십자가를 볼 때 내가 느꼈던 기쁨과, 고통으로부터 해방감이 나의 괴로움을 이기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내가 입고 있는 이 수놓은 겉옷을
볼 때 혹은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다니는 두루마리를 들여다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들지요. 또한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들면서 그런 느낌이 들곤 한답니다.”
분별: “무엇 때문에 당신은 그다지도 시온 산으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크리스천: “그곳에 가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 살아 계신 것을 뵐 수 있으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가면 지금까지 날 괴롭히던 모든 것들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사 25:8; 계 21:4)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함께 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말하건대 나는 내 무거운 짐을 벗게 해 주신 그분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으며, 내 자신의 내적인 허약함에 대해서 피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거룩, 거룩, 거룩하도다!’를 찬송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지요.”
9. 크리스천은 겸손의 골짜기에 들어서서 마귀 아볼루온과 맹렬한 격투를 벌이게 되지만 결국 그를 물리친다....
전신갑주를 입는다.
아볼루온
죄의 삯은 사망이라
크리스천: “그분께서 지금 당장 그의 신하들을 구원해 주지 않고 참으며 기다리시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러시는 거다.
크리스천: “마귀 아볼루온아, 어떤 점에서 내가 그분께 불충실했다는 말인가?”
아볼루온: “우선 네가 길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절망의 늪에 빠져 거의 질식하게 될 뻔했을 때 결심이 흔들렸었고, 너의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네 짐을 벗겨줄 때까지 한 길로 계속 나아가며 기다렸어야 할 텐데 세속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길로 빠져들고 말았으며, 어리석은 잠에 빠졌다가 귀중한 증거들을 잃어버렸었고, 사자의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자 속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지 않았더냐. 또 여행하는 도중에 보고 들은 것들을 이야기할 때의 네 모든 언행 속에는 내적인 자만심과 허영심이 드러나고 있었단 말이다.”
크리스천: “네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다. 더구나 네가 채 말하지 않은 많은 잘못들이 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섬기는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사 모든 걸 다 용서해 주신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너의 나라에서 살며 너를 섬길 때 몸에 배어 버린 여러 가지 약점들로 인하여 늘 신음하고 슬프게 생각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약점들마저도 용서해 주셨다.”
10. 크리스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심한 낙심에 빠지게 되었으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그곳을 지나가게 된다.
이처럼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는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꽤 오랜 시간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는 앞서가는 어떤 사람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 소리를 들은 크리스천은 몹시 반갑고 즐거웠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첫째, 그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또다른 사람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골짜기를 걷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고, 둘째, 이렇게 어둡고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거늘 자기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으며 단지 이곳에 있는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욥 9:11), 셋째, 이렇게 계속 쉬지않고 나아가노라면 조만간 동료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1. 크리스천은 믿음이라 불리는 훌륭한 동료를 만나게 되어 그와 함께 많은 유익한 대화를 나눈다.
믿음을 앞지르는 것 → 넘어진다. 실족 → 믿음이 다시 일으켜세워주지 않는이상 일어날 수 없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은 후에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서 뒹구는 격’
바람둥이를 만난 믿음
믿음: “당신도 물론 어느 정도 알고는 계시겠지만 그녀가 온갖 교태로 아양을 떨고 아첨하는 모습이란 상상할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그녀는 온갖 쾌락과 향락을 다 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길을 떠나 자기와 함께 가자고 끈질기게 유혹하더군요.”
크리스천: “하지만 그녀가 참된 양심의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겠지요.”
믿음: “당신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고 계시는군요. 모든 것이 다 육신과 정욕의 만족이지요.”
크리스천: “당신이 그녀의 유혹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잠 22:14)고 했지요.”
믿음: “아니, 그러나 저는 전적으로 그녀를 피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크리스천: “설마 당신이 그 여자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진 않았을 텐데?”
믿음: “물론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지요. 마침 전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더군요. ‘그녀의 발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잠 5:5). 그래서 그녀의 현란한 외모에 유혹되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 버렸지요. 그랬더니 그녀는 온갖 욕을 퍼부으며 물러갔고 나는 내 갈 길을 계속 갔습니다.”
크리스천: “오는 도중에 다른 습격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믿음: “곤고산이라는 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나이가 매우 지긋한 한 남자를 만났는데 내가 누구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나는 순례자이며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은 정직한 사람 같은데 내가 주는 월급을 받으면서 나와 함께 살지 않겠소?’ 하고 권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누구며 어디 사느냐고 물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이름은 첫 사람 아담이며(고전 15:45) 기만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다시 그가 시킬 일은 무엇이며 품삯은 얼마 정도인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일은 많은 쾌락들뿐이고 품삯은 그가 죽은 후에 상속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며 다른 종들을 거느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집은 아름다운 곳으로 세상의 온갖 맛있는 것들이 갖추어져 있고 종들은 전부 자신의 자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자식들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며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 모두와 결혼해도 좋다고 하더군요(요일 2:16). 또한 얼마 동안 내가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이 살자고 하더군요.”
크리스천: “그래, 결국 당신과 그 노인 간에는 어떤 결론이 내려졌소?”
믿음: “처음엔 그의 말에 다소 마음이 끌려 그 노인과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옳은 말을 하는 걸로 생각하며 그의 이마를 바라보니 ‘그의 행위를 살펴보아 노인을 멀리 하라’고 쓰여 있더군요.”
크리스천: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 “그러자 그가 지금 무슨 말로 온갖 유혹과 아첨을 할지라도 내가 그의 집으로 함께 따라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나를 노예로 팔아 버릴 것이라는 예감이 퍼뜩 들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무리 그런 말로 꾀어도 결국 집까지 함께 따라가지는 않을 테니 말을 삼가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는 욕설을 마구 퍼부으면서 내 뒤로 사람을 하나 딸려 보내 가는 도중에 몸과 마음을 한껏 괴롭혀 주겠노라고 악담을 하더군요. 그리하여 내가 그로부터 떠나려고 등을 돌리는 순간, 그가 나의 몸을 움켜쥐고 어찌나 세게 비틀며 끌어당기던지 마치 몸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 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외치면서 쉬지 않고 달려 산 위로 올라갔지요.
마침내 산의 중턱쯤에 이르렀을 때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나이가 바람처럼 빨리 내 뒤를 쫓아오는 것이 눈에 띄더군요. 결국 그는 정자 한 채가 서 있는 부근에서 나를 따라잡고 말았어요.”
크리스천: “아, 그 정자 말이군요. 내가 피곤해서 잠시 쉬려고 앉았다가 그만 잠에 빠져 버리는 바람에 가슴에 품었던 두루마리를 잃어버렸던 곳이에요.”
믿음: “아! 그런데 형제여, 내 말을 좀 끝까지 들어 주시오. 그 남자는 나를 따라잡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내려치는 바람에 난 땅에 나동그라져서 한동안 죽은듯이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마침내 내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때 왜 이토록 심하게 구느냐고 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유혹에 보이지 않게 마음이 끌렸던 죄 때문이라고 하면서 또 한 번 세차게 가슴을 내리치며 때리는 바람에 난 또다시 벌렁 뒤로 나자빠져서 전처럼 정신을 잃은 채 죽은듯이 그의 발꿈치 밑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하게 소리쳤습니다만 그는 자비를 베푸는 방법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다시 저를 내리쳐 쓰러뜨려 버렸어요. 어떤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가면서 그를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나를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크리스천: “그를 만류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믿음: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옆으로 지나가실 때 보니 손과 옆구리에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요. 그래서 난 계속 산 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 “당신을 뒤쫓아와서 때린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용서해 주는 법이 없고 그의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량도 모르는 사람이지요.”
믿음: “그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내가 고향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을 때 찾아와서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집 전체를 몽땅 태워 버리겠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요.”
크리스천: “혹 당신이 모세와 만났던 언덕의 꼭대기에 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믿음: “물론 보았지요. 그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사자들도 보았는데, 그때가 바로 정오여서 사자들이 낮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해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문지기 앞을 지나쳐 산 아래로 그냥 내려갔습니다.”
불만
교만 오만 자만 세상 영광
수치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5:33; 16:18)
믿음: “또 있었지요. 수치(Shame)라는 이름의 친구를 만났는데 내가 순례여행 도중에 만난 사람 중에서 그처럼 이름이 걸맞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얼마만큼 논쟁을 한 뒤에 다소 마음을 돌리거나 단념하고 마는데 이 철면피 같은 인간은 그저 막무가내였으니까요.”
크리스천: “아니,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믿음: “무슨 말이냐구요? 글쎄, 그 작자는 종교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어요. 사람이 종교에 마음을 두는 것 자체가 가련하고 비열하고 무기력한 일이라는 거예요. 부드러운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사내답지 못한 것이며, 그 시대의 용감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스스로 과시하는 영웅적인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고 종교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얽매이게 함으로써 뭇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는 권세가 있고 부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믿음을 통하여 장차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버리고 어리석은 바보가 되라고 쉽사리 설득당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요 7:48; 고전 1:26; 3:18; 빌 3:7, 9). 게다가 옛부터 순례자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비천하고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세조차 알지 못할 뿐더러 자연과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자들이라고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여기서 내가 다 말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말했는데, 예를 들자면 설교를 들으면서 울며 슬퍼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며,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한숨짓고 괴로워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말하더군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이웃 사람들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라든지, 조금이라도 돈을 빌리면 반드시 갚는 것 등 모두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거예요. 더구나 종교는 위대한 사람이 사소한 악행 — 악행이란 말을 쓰지 않고 좀 더 근사한 말을 쓰기는 했지만 — 여하튼 조그만 실수를 저질러도 비난받게 될 뿐 아니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라고 하여 비천한 사람들일지라도 받아들이고 존경하게 되니 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합니다.”
크리스천: “그래,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말해 주었습니까?”
믿음: “처음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다소 당황했지요. 그의 논증은 나를 몰아붙여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도록 만들었고 그 수치란 놈이 나의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려서 하마터면 내가 그에게 당할 뻔했지요. 그러나 마침내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는 성경 말씀을 상기하면서 수치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니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니까 최후의 심판날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죽음이 결정되는 것은 세상의 허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혜와 율법에 따르는 것임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옳고 아름다운 것임을 재삼 확신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신앙과 온유한 양심을 더 즐겨 받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천국을 위하여 세상에서 바보 취급 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라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존경받으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위대한 영웅이나 부자들보다 더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나는 ‘수치야, 물러가라. 너는 나의 구원을 방해하려는 원수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너를 환영할까 보냐? 그렇게 한다면 주님이 강림하시는 날 내가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지금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어찌 축복을 바랄 수 있으리요?’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 수치란 놈은 대단히 뻔뻔스러운 악한이었어요. 내가 어떻게든지 그를 뿌리쳐 버리려고 애를 썼으나 그 놈은 악착같이 내게 달라붙어 뒤쫓아오면서 내 귀에다 입을 바싹 대고 종교에 속하는 여러 가지 약점들을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그놈에게 말했지요. ‘네가 아무리 이런 수작을 계속해 보았자 결국 헛수고일 뿐이야. 나는 네가 경멸하고 비난하는 것들을 가장 존경하고 있으며 또한 거기서 영광을 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지긋지긋하게 성가신 놈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를 떼어 버리고 이렇게 노래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2. 달변의 아들 수다쟁이를 만나 믿음이 대화를 나누나 믿음의 정체를 알자 수다쟁이가 떠나다.
크리스천: “속았지요! 틀림없이 속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도다’(마 23:3)라는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는 말씀도 잘 새겨 두세요. 그 사람은 기도와 회개, 신앙과 거듭남 등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말로만 그칠 뿐입니다.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고 고향에서나 타향에서나 그를 죽 관찰해 왔으므로 그에 대해서 내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그의 가정은 계란 흰자위가 맛이 없듯이 종교의 참맛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그의 집에서는 기도나 회개의 징조가 도무지 보이지 않으며 차라리 그의 짐승들이 그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어디를 가나 그를 좋게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고, 그로 인하여 종교 자체도 비난을 받고 있지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밖에서는 성자요, 집에서는 악마’**라고 한답니다. 그의 불쌍한 하인들이나 가족들이 표리가 다른 그의 언행으로 인하여 고초를 겪고 있는데, 지독한 구두쇠인 데다가 욕을 마구 퍼부으면서 너무나 하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혹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늘 당황하고 있답니다
저 사람과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그와 거래하기보다는 차라리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터키 사람들과 거래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말한답니다. 오히려 터키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더 공정한 거래가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저 수다쟁이는 가능하기만 하면 남들 위에 올라서서 부정하게 속이고 횡령하기 일쑤이고 협잡으로 그들을 압도하여 괴롭히기도 한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조차도 자신의 행적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만일 자식들 중 어느 하나라도 약한 담력을 소유한 바보라고 판단되면 — 온유하고 선량한 양심의 소유자를 그는 바보스러운 약자라고 부르지요 — 바보니 멍청이니 하고 모욕을 주면서 결코 그들에게 일을 맡기지도 않고 남 앞에서 칭찬해 주는 일도 절대로 없답니다.
나로서는 만일 내 의견을 솔직히 말한다면 그의 추악한 일상 생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꾸러지고 구렁텅이에 빠졌으며, 만일 하나님께서 막지 아니하시면 더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믿음: “아! 형제여, 나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은 크리스천다운 양심으로 사람들을 정직하게 평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사실상 당신이 말한 그대로일 거라고 믿습니다.”
듣는 것은 단지 씨를 뿌리는 작업에 불과하고, 말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실제로 참된 열매가 열렸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날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제각기 그들이 거둔 열매의 성과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날에 이르러 심판자께서는 ‘너는 믿었느냐?’ 하고 묻지 아니하시고 ‘너는 진실로 행했느냐? 혹은 말만 하고 다녔느냐?’ 하고 물으실 것이며 그 행함의 여부에 따라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크리스천: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잘은 모르지만 성경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할 것 같은데 저도 한 마디 보태지요. 사도 바울은 말만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전 13:1-3)고 하셨고, 다른 부분에서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여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고전 14:7). 생명이 없는 것들, 즉 진실한 신앙과 복음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혀가 천사의 목소리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지라도 생명의 자손들 틈에 끼어서 천국에서 함께 살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믿음: “글쎄, 당신만 원하신다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십시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지 화제는 저에게 맡긴다고 하셨으니까 이런 것을 얘기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그 변화가 나타날까요.”
수다쟁이: “아, 그러면 사물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는 말씀이군요. 아주 좋은 화제를 택하셨습니다. 기꺼이 당신께 대답해 드리지요. 간단하게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우선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충만하게 되면 죄에 대한 반발의 소리가 크게 일어날 것이고, 둘째로….”
믿음: “아니, 잠깐만. 우선 한 가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제 생각에는 죄에 대한 반발의 소리라기보다는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혐오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수다쟁이: “아니, 죄에 반발하는 소리와 죄를 혐오하는 생각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씀입니까?”
믿음: “아! 큰 차이가 있지요. 사람은 단지 전략상 죄를 비난하는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진실로 죄 그 자체를 미워하려면 죄악을 대적하는 경건한 반감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단 위에서는 죄를 비난하여 크게 외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이나 가정에서나 행동에서는 그 발언대로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여러 번 보았지요. 요셉의 주인 마누라는 마치 자신이 정숙하고 경건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지만 기꺼이 요셉과 더불어 부정한 짓을 행하려 들었습니다(창 39:15). 마치 어떤 어머니가 무릎에 앉힌 아이를 향해 못된 아이니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막 비난하다가도 어느새 아이를 껴앉고 입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수다쟁이: “내가 보기에 당신은 억지로 남의 흠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군요.”
믿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지 현상을 옳게 판단하고자 할 뿐입니다. 자 그럼, 마음속에 나타나는 은혜의 작용의 두 번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다쟁이: “복음의 신비에 대한 많은 지식의 획득이지요.”
믿음: “그것이 은혜가 나타나는 첫 번째 표지가 되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첫째 표지이건 마지막 표지이건 그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신비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지식을 획득한다 할지라도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영혼에 적용하는 은혜의 혜택이 될 수 없으니까요. 사람이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결국 허무한 존재이고, 결과적으로 지식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시길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요 13:12, 17). 즉 예수께서는 진리를 아는 데에 축복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축복을 두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종’(눅 12:47)이 있듯이 행함이 따르지 않는 지식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된 크리스천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당신이 말씀하시는 표지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안다는 것은 말하기 좋아하고 허풍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뿐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아는 대로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된 지식이 없는 마음도 얼마든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식이 없는 마음은 공허하기 때문에 지식은 물론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색으로만 만족하는 지식도 있고, 신앙 및 사랑의 은혜와 함께 동반하는 지식도 있지요. 전자는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과시하는 지식이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진실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후자의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수다쟁이: “당신은 또다시 내 흠만 잡으려 드는구려. 그런 말은 덕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 “그럼, 만일 좋으시다면 은혜의 작용이 나타나는 표지를 또 하나 말씀해 주십시오.”
수다쟁이: “아니, 그만두겠습니다. 우리 둘의 의견이 서로 일치되지 않을 게 뻔하니까요.”
믿음: “만일 당신이 말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의견을 제시해도 괜찮겠습니까?”
수다쟁이: “당신 좋을 대로 하시구려.”
믿음: “마음속에 은혜의 작용이 나타나는 사람은 그 자신은 물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요. 은혜를 친히 소유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즉, 은혜의 작용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의식을 절실히 깨닫게 되고, 특히 본성의 타락함과 불신앙의 죄를 인식하게 되지요. 즉 은혜의 덕택으로 그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비를 얻지 못하면 그는 정죄받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요 16:8, 9; 롬 7:24; 막 16:16).
이와 같은 방향으로 사물을 보고 느낌으로써 그는 죄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인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께서 그의 마음속에 나타나사 평생 동안 그가 구주 가까이 살아가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목마름과 갈급함으로 추구하고 또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시 38:18; 렘 31:19; 갈 2:16; 행 4:12;마 5:6; 계 21:6).
이처럼 구주를 믿는 믿음의 강하고 약한 정도에 따라 그의 기쁨과 평화, 경건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 구주를 좀 더 알고자 하는 소망의 정도가 좌우되며, 이 세상에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열성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기는 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곧 은혜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인식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부패된 상황에 처해 있고, 이성의 잘못된 남용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가 은혜에 의한 것임을 확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전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체험적으로 고백함(롬 10:10; 빌 1:27; 마 5:19).
2. 그러한 고백에 실제로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 즉 경건한 생활, 경건한 마음, 경건한 가정(만일 그가 가정을 가지고 있다면), 경건한 일상 생활의 대화 등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경건하고 깨끗하게 하면 대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미워하게 되며, 가정 내에서도 이러한 죄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암암리에 죄를 멀리하게 되고, 마침내 온 세상에 경건함을 증진시키되 위선자나 지껄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단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에 의지하여 믿음과 사랑으로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요 14:15; 시 50:23; 겔 20:43; 마 5:8; 롬 10:9, 10; 빌 3:17, 20).
자, 선생님, 제가 방금 은혜의 작용과 그 나타나는 효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혹시 이의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이의가 없으시다면 당신께 두 번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만.”
수다쟁이: “아니, 지금 난 반대할 입장이 아니라 단지 듣기만 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어서 두 번째 질문이나 해 보시구려.”
믿음: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은혜의 작용에 대한 내 설명 중에 첫 번째 것을 당신도 경험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당신의 생활과 당신의 하는 말이 서로 잘 부합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의 종교는 행위와 진실 안에 서 있기보다는 말과 혀끝에만 존재하지는 않습니까?
제발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내게 대답하시고자 할 때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아멘 하고 인정해 주시리라 믿는 것만 말해 주시고, 당신의 양심이 안에서 당신을 시인하는 것 이외에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 10:18).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상 생활이나 이웃들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증명해 주는데 당신 혼자서만 이렇다 저렇다 장황하게 떠벌이는 것도 크나큰 죄악임을 명심해 주십시오.”
수다쟁이: (이 말을 듣고 처음에 얼굴을 붉히던 수다쟁이는 곧 마음을 다시 완악하게 고쳐먹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믿음 씨, 당신은 지금 경험이니 양심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면서 당신이 한 말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군요. 나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고 당신이 말한 그따위 질문들에 대해서 지금 대답할 기분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교리문답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내가 당신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할 의무도 없고, 설사 당신이 교리문답자인양 으스댄다 하더라도 당신이 내 심판관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바입니다. 당신이 어째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지 그 이유를 좀 말해 주시겠소?”
믿음: “내 눈에 당신이 말하기만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당신이 일반 상식 이외에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오. 그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당신의 종교는 단지 혀끝에서만 맴돌 뿐이고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크리스천들 가운데 하나의 오점으로서 당신의 경건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하여 종교가 더 나쁜 인식을 받게 되고, 당신의 사악한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이 벌써 여럿이며, 앞으로도 그로 인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할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의 종교는 술집과 탐욕과 부정한 짓과 헛된 맹세와 거짓말과 잡담 등 온갖 좋지 않은 것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습니다. 한 명의 매춘부가 여성들 전체에게 수치가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당신은 모든 성도들의 수치가 된다는 평판이더군요.”
수다쟁이: “당신은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처럼 성급하게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미루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군요. 자, 그러니 이만 헤어집시다. 잘 가시구려.”
그때 크리스천은 믿음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꺼냈다.
크리스천: “그 사람과의 대화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말했지 않소. 당신의 말과 그자의 정욕이 서로 어울려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신과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떠나 버렸군요. 내가 이미 말했듯이 그가 떠나 버렸으니 그냥 가게 내버려 두십시다. 손해보는 것은 결국 그 사람 자신이니까.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는 한 아마도 그는 계속 이야기를 하려 들었을 텐데 스스로 떠나가 버렸으니 우리는 괴로움을 면하게 된 셈입니다. 그와 계속 동행했더라면 단지 오점만 남겨 주었을 겁니다. 또한 사도도 말하기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5)고 하였지요.”
믿음: “하지만 저는 그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에게 한 말을 그가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하튼 저는 그 사람에게 명백하게 이야기해 주었으니까 설사 그자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제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크리스천: “그처럼 명백하게 그의 잘못된 종교관을 지적하고 참된 진리를 말씀해 주신 일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요즘에는 당신처럼 성실하게 신의로써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매우 적기 때문에 종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게 되는 거지요. 즉 말하기 좋아하는 바보들이 말로만 종교를 믿으면서 경건한 신자들 사이로 돌아다니며 타락하고 허영에 찬 말들을 지껄임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고 기독교를 더럽히며 신실한 자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을 다룰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처럼 명백하고 신실하게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면 말보다는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게 되거나, 아니면 경건한 성도들과 사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떠나 버리거나 양자택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13. 그들이 허영의 시장에 들어가고, 그 중 믿음이 순교를 하다.
이 세상의 속된 것들에 마음을 두어 쓸데없는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여러분들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살펴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는 말씀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욕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거짓되고 사악한 것입니다.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십시오(사 50:7).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여러분들 편에 서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토록 심한 고통 중에서도 두 순례자들은 더욱 현명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그들에게 퍼부어지는 수치와 경멸을 온유함과 인내로써 받아들였다.
시기 미신 아첨 바알세불
옛사람
음란
사치
허영
색욕
탐욕
믿음: “우선 시기 씨가 말한 것에 대한 답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법률이나 규칙, 관습,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결코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내 말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나를 납득시킬 만한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여기 당신들 앞에서 기꺼이 내가 한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둘째로, 미신이 내게 반박하여 증언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믿음이 필요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신성한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단지 인간적인 신앙에 불과할 뿐 영생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참된 신앙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로, 아첨 씨가 말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 내가 비방을 했느니 헐뜯었느니 하는 따위의 말은 제쳐두고 — 이 도시의 임금님과 소위 귀족들이라고 불리는 그의 신하들은 이 마을이나 혹은 이 나라에 사느니보다는 오히려 지옥에 가서 살아야 마땅할 인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오니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배심원들은 의견을 모으기 위해 잠시 퇴정했는데, 그들의 이름은 맹목 씨(Mr. Bilnd-man), 쓸모없음 씨(Mr. No-good), 악의 씨(Mr. Malice), 호색 씨(Mr. Love-lust), 방탕 씨(Mr. Live-loose), 성급 씨(Mr. Heady), 자만 씨(Mr. High-mind), 증오 씨(Mr. Enmity), 거짓말쟁이 씨(Mr. Liar), 잔인 씨(Mr. Cruelty), 빛 혐오 씨(Mr. Hate-light), 완고 씨(Mr. Implacable) 등이었다. 그들은 이미 제각기 마음 속에 피고를 반박하는 유죄 판결에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얼마 후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결정짓고 나서 재판장에게 보고했다.
14. 크리스천이 다른 훌륭한 동행자 소망을 만나다.
사심: “마을 주민들 거의 전체가 제 친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특히 변절 경(Lord Turn-about), 기회주의자 경(Lord Time-Server), 미사여구 경(Lord Fair Speech)(이분의 조상에게서 그 성을 따라 마을의 이름을 지었지요), 게다가 능글능글 씨(Mr. Smooth-man), 양다리 씨(Mr. Facing-both-ways), 무관심 씨(Mr. Anything), 그리고 우리 교구의 목사로 일하고 계신 두말 씨(Mr. Two-tongue)는 어머니의 한 형제이시지요.
가식 여사
사심: “그들의 고집스러운 생각에 의하면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라도 순례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하여 저는 순풍과 밀물을 기다려 더 쉽고 안전하게 여행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내세웠지요.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온갖 어려움과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나서려는 데 반해 저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것이 또 하나의 차이점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반박하더라도 옳다고 여기는 자신들의 생각을 굳게 지키려고 고집하는 데 반해 나는 당시의 시대 조류에 맞추어 내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는 한 종교를 지키려 할 뿐이고, 그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모욕을 당하더라도 종교와 신앙을 따르려 하나 나는 종교가 황금 신발을 신고 태양빛 아래서 만인의 갈채를 받을 때만 종교를 따르려 하고 있답니다.”
세상욕심 :
크리스천: “믿음이 있는 자라면 어린 아이라도 그런 문제 수만 개쯤은 대답하고도 남을거요. 사람이 단지 빵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조차 불법이라 하였거늘(요 6:26) 예수님과 종교를 이용하여 현세의 쾌락과 유익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혐오할 만한 일인가! 이교도들이나 위선자들, 악마나 마녀들이 아니라면 그 같은 행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나 행위가 이교도의 그것에 속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옛날에 하몰과 세겜이 야곱의 딸과 가축에 탐을 내었으나 오직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모두 할례한 것처럼 우리도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의 가축과 짐승과 재산 및 그밖의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야곱의 딸과 가축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종교를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하고자 했지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더 알고 싶다면 성경을 펴들고 그 대목 전체를 읽어 보시구려(창 34:20-23).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도 역시 이런 따위의 무리들이었지요. 그들이 드리는 장황하고 기나긴 기도는 짐짓 신앙을 가장하는 겉치레에 불과했고 그들의 본래 목적은 과부의 집을 노리고 차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되고 사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더 무거운 정죄 판결을 내리셨지요(눅 20:46-47).
마귀인 유다 역시 이런 식의 종교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주머니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배반한 후 그 돈을 소유하려 했으나 결국 버림받고 내던져져서 영원한 지옥의 자식이 되고 말았지요. 마술사였던 시몬도 역시 이런 따위의 종교를 얻고자 했으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써 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베드로의 입으로부터 정죄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행 8:19-22).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종교를 믿는 자는 결국 이 세상의 부귀를 위하여 종교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유다는 이생의 재물이 탐나서 종교를 믿었다가 결국 이생의 재물을 위하여 그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당신들이 하던 것처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옳다고 시인하는 것은 모두가 이교적이요, 위선적이고 마귀적인 망상일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품고 행하는 자는 제각기 그 행한 바에 따라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그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자포자기가 되어 버린 탓이 아닐까요? 그들을 무엇에 비교하면 적합할까요? 재판관 앞에서 소매치기하고, 교수대 아래서 남의 지갑을 째는 자들과 같겠지요. 소돔 사람들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다(창 13:13)고 하는데, 이는 소돔 땅을 에덴 동산 같은 곳으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목전에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유발시켜 하늘에서 가장 뜨거운 불의 형벌이 내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목전에서까지 범죄하는 자들, 또 그 본보기들이 그들 앞에 있어서 경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범죄하는 자들은 가장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결론은 결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맞습니다. 우리들, 특별히 제가 이런 본보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게 하며, 항상 롯의 아내를 기억하게 합니다.”
15. 크리스천과 소망이 길을 잘못 들어 절망 거인의 손에 빠진다.
이때 그들은 어디선가 자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렘 31:21).
그러나 이즈음에는 물이 몹시 불어나 뒤로 돌아가기란 매우 위험스러웠다. (그때 나는 우리가 길 안에 있다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보다 길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토요일 한밤중쯤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기도는 거의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침이 되기 직전에, 착한 크리스천은 반쯤 놀란 표정으로 갑자기 격렬하게 말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내가 멍청이지, 자유롭게 도망칠 길이 있는데도 그동안 이 악취나는 토굴에 갇혀 있었다니! 내 가슴에 약속이라 불리는 열쇠가 하나 있는데, 그 열쇠는 의심성에 있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16. 순례자들이 기쁨의 산에서 목자들의 영접을 받는다.
목자 지식
목자 경험
목자 경계
목자 성실
오류 Error → 몸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떠드는 후메내오와 빌레도
조심 → 계단식 문 → 올바른 길은 험하다 → 초원에 나있는 길로 넘어들어감 (쉬운길) → 절망거인 → 의심의성 → 지하감옥 → 눈을 뽑고 무덤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맹인이 된다. →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위선자 → 에서 출생권리 파는 자 유다 스승을 파는 자 알렉산더 복음을 모욕 아나니아 와 그 아내 삽비라 속이는자 거짓말하는 자
17. 순례자들이 무지와 만난다 - 작음믿음이 강도 만난 이야기 - 크리스천과 소망이 그물에 걸리다....
자만 →
무지 →
변절→
작은 믿음 →
크리스천: “물론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을 비롯해 거기 속한 여러 권리들을 팔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망령된 자들과 같이 주된 축복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에서와 작은믿음 두 사람은 차이가 있으며, 그들의 재산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에서의 장자권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작은믿음의 보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있었지만, 작은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육신적 미각을 만족시키는 데 급급했지만 작은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또 에서는 자기 정욕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 그러나 작은믿음은 비록 믿음은 작았지만, 이 작은 믿음 덕분에 그러한 방종을 멀리할 수 있었고, 장자권을 판 에서처럼 자기 보석들을 팔지 않고 이를 보면서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서건 에서가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작은 믿음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만 육체에 따라 행동하고 — 믿음이 없는 자는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 자기의 장자권과 영혼과 그의 모든 것을 지옥의 악마에게 팔아 버린다 할지라도 놀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발정한 암나귀의 경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렘 2:24). 그들은 일단 마음이 정욕에 붙잡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행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무장을 하고 방패를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성경
두 번째로, 우리는 임금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심으로 우리를 호위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첨쟁이 → 거짓 사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자
18. 순례자들이 무신론자와 만나고 마법의 땅을 통과한다....
크리스천: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이 당신에게 역사하기 시작한 후에도 죄를 계속 지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망: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나는 그것이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인 줄 몰랐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죄인의 회심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죄는 여전히 내 육체에 달콤하게 느껴졌고, 나는 그것을 떠나기 싫어했습니다. 셋째로, 나는 옛 친구들과 어떻게 결별해야 할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바람직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죄의식이 나를 덮칠 때는 심히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파 나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 정말 내가 지은 죄들을 마음에 기억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크리스천: “그런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소망: “내 생활을 좋게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그래서 고치려고 노력해 봤습니까?”
소망: “예, 나는 죄뿐 아니라 죄악된 친구들을 피하고 여러 가지 종교적 의무들을 수행했지요. 예를 들면, 기도나 성경 읽기, 울며 회개하기, 이웃들에게 진리의 말씀 전하기 등이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비롯해 내가 행한 이 일들은 하도 많아 여기서 다 열거를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 “그 일들을 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소망: “예, 잠시 동안은요. 하지만 결국 고통은 다시금 나를 엄습해 왔기 때문에 나의 개혁은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지요.”...
크리스천: “이제 생활을 개혁한 이후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소망: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떠올랐지요. 특히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때부터 나는 다음과 같이 혼자 따져 나가기 시작했지요. ‘만약 내 의가 다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면, 또 율법의 행위로써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하고도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면 율법으로 하늘 나라에 간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는 계속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가게 주인에게 100파운드의 빚을 진 다음, 후에 모두 갚았다고 하자. 그런데 만약 이 옛날 빚이 장부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찌되랴? 가게 주인은 그를 고소해서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둘지도 모른다.’”
크리스천: “그러면 당신은 그 생각을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까?”
소망: “예, 그래서 나는 자신에 관해 이렇게 생각했지요. ‘나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회계 장부에 빚이 많이 올라 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이 개혁된 생활로는 그 빚을 청산할 수 없 ...
그러므로 나는 조용히 지금의 개선된 생활에 관해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예전에 지은 범죄 때문에 내게 닥친 저주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크리스천: “매우 좋은 적용입니다. 계속 이야기하십시오.”
소망: “내가 생활을 개선한 후에도 계속 나를 괴롭혀 온 또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시야를 좁혀 내 최선의 행위만을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여전히 죄를 발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는 새로운 죄로써, 내 최선의 행위와 함께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나 자신과 내 의무들에 대해 어리석은 자부심을 가져 왔지만, 설사 나의 예전 생활에 전혀 흠이 없었다 치더라도, 오늘 하루 동안 내가 지은 죄는 나를 지옥으로 보내기에 충분하다.’”
크리스천: “그래서 당신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소망: “무엇이든요! 믿음을 만나 내 마음이 깨어지기 전까지 내가 한 일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나는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는 나에게 죄 없으신 분의 의를 덧입지 않는 한 자신의 의나 세상 의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크리스천: “그의 말이 진실처럼 여겨졌습니까?”
소망: “만약 내가 자신의 개선된 삶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고 있을 때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는 그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보라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고, 또 내 최선의 행실 속에 끼어들어 있는 죄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크리스천: “그런데 그가 처음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때 정말 그의 말대로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소망: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그 이야기는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후 그에 대해 온전한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크리스천: “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하면 그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까?”(롬 4장; 골 1장; 히 10장; 벧후 1장)...
소망: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분이 곧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오른편에 거하고 계신 주 예수님이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그리고 그분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되, 그가 육체로 이 땅에 거하실 동안 친히 행하신 일들과 그가 나무에 달려 고난 당하신 사실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그분의 의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의 행위와 그의 죽으심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요, 그의 행위들과 그 행위의 가치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된다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천: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소망: “나는 그분이 나를 구원하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줄로 여기고 그를 믿지 않겠다고 말했지요.”
크리스천: “그랬더니 믿음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소망: “그는 나에게 직접 가서 그를 만나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분이 나를 초청했기 때문에 그것은 주제넘은 짓이 아니라고 하더군요(마 11:28). 그리고 믿음은 내가 더욱 선선히 나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우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주면서, 그 책에 담긴 글은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질 때까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24:35).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는 대답하기를, 무릎을 꿇고(시 95:6; 렘 29:12, 13; 단 6:10) 마음과 뜻을 다해 아버지께 그를 계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 나는 다시 그분께 청원을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는 이르기를, 가 보면 시은좌 위에서 그분을 발견할 수 있으리니(출 25:22; 레 16:2; 히 4:16), 그분은 오래 전부터 거기 계시면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믿음에게 그분을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또 믿게 하옵소서. 만약 그의 의가 없으면 또 내가 그의 의를 믿지 아니하면, 나는 결국 내쫓김 당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당신이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아들을 기꺼이 바치셨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니 주여, 지금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 영혼을 구원하시어 당신의 크신 은혜를 나타내시옵소서. 아멘.’”...
수백수천번 기도하였음.
소망: “이를 통해 나는 세상이 아무리 자기 의를 주장해도 이는 저주 받은 상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비록 정의로운 분이시지만 자기에게 나오는 죄인들을 공의롭게 의롭다 하실 수도 있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또 이로 인해 나는 예전의 사악한 생활을 심히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의 무지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고, 거룩한 생활에 대한 사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예, 만약 내 몸에 100갤런의 피가 있다면, 이것을 주 예수님을 위해 다 쏟아 부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 순례자들이 무지와 다시 대화를 나눈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 방식에 대한 생각이 그 말씀의 판단과 일치될 때, 두 가지가 다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 “하나님에 관한 선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크리스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말했듯이,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될 때, 그 생각은 선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해 생각할 때 그러합니다. 그의 존재와 속성에 관해서는 내가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와 연관시켜 하나님의 속성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며,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때도 우리 속에서 죄를 보실 수 있습니다. 또 그는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을 아시며,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환히 들여다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그의 코 앞에서 악취를 풍길 뿐이며, 아무리 우리가 최선의 행위를 다한다 해도 그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에 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지: “뭐라구요?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없이 다만 그의 인격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런 독단적인 착상은 열망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들며 우리를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 만약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개인적 의에 의해 의로움을 얻게 될 테니까요.”
크리스천: “당신의 이름처럼 참 무지하군요. 당신의 그 대답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당신은 의로움을 주는 의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하면 믿음으로써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부터 구할 수 있는지 모르고 있군요. 예, 당신은 이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의 참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힘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굴복하게 만들...
며, 그의 이름과 그의 말씀, 그의 길과 백성을 사랑하게 합니다. 당신은 무지하게도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군요.”
소망: “그에게 하늘로부터 계시되는 그리스도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무지: “뭐라구요? 당신은 계시 정말 좋아하는군요. 나는 당신들처럼 계시 운운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약간 나갔다고 믿어요.”
소망: “아니 왜요?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육체의 자연적 이해력으로는 그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를 알고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무지: “당신은 그렇게 믿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당신처럼 많은 변덕스러운 생각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내 마음이 당신의 믿음보다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크리스천: “내가 한 마디만 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이 문제를 그렇게 가벼이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단언하건대, 방금 내 선한 친구도 이야기했듯이, 아버지의 계시 없이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굳건히 붙어 있게 하는 믿음도(올바른 믿음일 때 그러합니다) 그의 넘치도록 크신 능력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마 11:27; 고전 13:3; 엡 1:18, 19). 불쌍한 무지 씨,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이 믿음의 역사에 관해 무지한 것 같군요. 공상에서 깨어나 자신의 추악함을 바로 보고 주 예수님께로 피해 가십시오. 그리하면 그의 의, 곧 하나님의 의를 통해(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주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지: “당신들은 어서 빨리 가십시오. 나는 도저히 당신들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앞으로 나아갈 동안, 나는 잠시 뒤에 머물러 있어야겠습니다.”...
소망: “올바른 두려움이란 어떤 것일까요?”
크리스천: “참되고 올바른 두려움이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 두려움은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부터 생겨나는데, 이런 죄의식은 결과적으로 구원을 낳게 됩니다. 둘째로, 그 두려움은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도록 합니다. 셋째로, 그 두려움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게 하며, 그의 말씀과 길을 애정 있게 지키게 하고, 거기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일을 못하게 막지요. 즉,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나 화목을 깨는 일, 성령을 슬프게 하는 일, 원수로부터 비난 받을 만한 일들을 피하게 합니다.”...
크리스천: “첫째로, 그들은 죄의식이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옴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귀로부터 오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그 죄의식이 자신들을 멸망시킬 것처럼 생각하고 이를 거부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 두려움이 자신들의 믿음을 해칠까봐 걱정합니다. 애석한 일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완악하게 먹고 그 두려움을 거부합니다. 셋째로,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어도 그렇지 않은 척 가장합니다. 넷째로, 그들은 이 두려움이 자신들의 알량하고 낡은 자존심을 손상시킬까봐 온 힘을 다해 이를 막으려 합니다.”...
20. 순례자들이 상쾌한 쁄라 땅을 지나 안전하게 죽음의 강을 건너자,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영접되어 들어간다....
그때에 순례자들이 물었다. “우리는 그 거룩한 곳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 사람이 대답했다. “거기서 당신들은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초의 대가로 평안을 받아야 하며 모든 슬픔의 대가로 즐거움을 받아야 합니다. 또 당신들은 당신들이 뿌린 씨앗, 곧 기도와 눈물과 임금님을 위해 당한 모든...
두 사람이 대답했다. “거기서 당신들은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초의 대가로 평안을 받아야 하며 모든 슬픔의 대가로 즐거움을 받아야 합니다. 또 당신들은 당신들이 뿌린 씨앗, 곧 기도와 눈물과 임금님을 위해 당한 모든 고난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갈 6:7, 8). 그리고 여러분은 금면류관을 쓰고, 거룩하신 분을 영원토록 보며 즐겨야 합니다. ‘이는 거기서 당신들이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2).
또한 당신들은 거기서 임금님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소리 높여 감사함으로써 그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당신들은 그를 섬기고 싶어했지만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거기서 당신들의 눈은 기쁨으로 그를 볼 것이며, 당신들의 귀는 전능하신 분의 즐거운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거기서 당신들보다 앞서 그리로 간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이며, 즐거움으로 큰 상급을 받게 될 터인데, 이 상급은 당신들 뿐 아니라 당신들 뒤를 따라 이 거룩한 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영광과 위엄으로 옷을 입고, 영광스러운 임금님과 함께 마차에 오를 것입니다.
그가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가운데서 바람 날개를 타고 재림하실 때, 여러분은 그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가 심판의 보좌 위에 앉으실 때 당신들도 그 곁에 앉을 것입니다. 그가 천사들이든 인간들이든 불법의 사역자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실 때, 당신들도 배심원으로 그 판결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천성에 다시 돌아오실 때, 당신들도 나팔 소리와 함께 돌아와 영원히 그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살전 4:13, 17; 유 14, 15; 단 7:9, 10; 고전 6:2, 3).
그들이 천성문을 향해 나아가는데 보니, 한 무리의 천군들이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두 빛나는 자들이 그 천군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 있을 때 우리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들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들을 모셔오라 명하시기에, 여행을 마친 이분들이 기쁨으로 구속자의 얼굴을 뵙도록 하려고 모셔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이때 다시 왕의 나팔수들이 여러 명 나와 그들을 맞이했는데, 희고 빛나는 옷들을 걸친 나팔수들은 아름답고 우렁찬 곡조로 온 천국에 울려 퍼지게 했다. 이 나팔수들은 크리스천과 소망에게 잘 왔다고 수만 번이나 인사를 하였는데, 그 인사는 나팔소리와 큰 외침이었다. 그리고 나팔수들
이제 내가 꿈에 보니, 그 두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리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의 몸은 변화되었고 의복은 황금같이 빛났다. 또 사람들이 수금과 면류관을 가져와 그들에게 주었다. 수금은 찬양하는 데 쓰는 것이었고, 면류관은 영예의 상징이었다.
그때 내가 꿈에 들으니, 온 성의 종들이 다시 기쁨으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주님의 기쁨에 참예하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그들이 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대문이 활짝 열려 내가 안을 들여다보니, 성은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또한 거리는 금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은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와 노래하는 데 쓰는 황금 수금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한 날개를 가진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쉬임없이 “거룩, 거룩, 거룩, 우리 주님이시여”라는 말로 서로 화답하였다. 이후에 문이 닫혔는데, 그곳을 들여다본 나도 거기 들어가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나서 뒤로 고개
2부
1. 크리스티아나가 그녀의 네 아들과 이웃 사람 한 명과 더불어 순례를 시작한다....
2. 크리스티아나와 자비심과 아이들이 무사히 늪을 지나 좁은 문에서 친절한 영접을 받는다....
3. 순례자들이 공격을 받으나 구조되어, 해석자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는다....
그러자 해석자가 대답했다. “이 울새는 일부 거짓된 신앙고백자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이 울새처럼 목소리가 곱고 빛깔도 아름다우며 거동도 의젓하지요, 또한 그들은 참된 신앙고백자들을 대단히 사랑하는 것 같고 그들과 친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입니다. 마치 의로우신 분의 빵조각을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님께서 택하신 경건한 자들의 집인 교회에도 자주 드나드는 체합니다. 그러나 자기네들끼리 모이면 울새들이 거미를 잡아 먹듯이 식단을 바꾸어 죄를 물 마시듯이 먹고 삼키지요.”...
“암퇘지는 살이 찔수록 진흙구덩이를 더 좋아하고, 황소는 살이 찌면 찔수록 더 먼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며, 정욕을 지닌 인간은 건강하면 할수록 악에 더 쉽게 빠지는 법입니다.
여자들에게는 깨끗하고 곱게 단장하려는 욕망이 있으니 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고귀한 덕으로써 단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루 이틀쯤 밤을 새우기는 쉽지만 1년 내내 앉아서 밤을 새우기는 어렵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쉽지만, 끝까지 신앙을 유지하는 일은 마땅한 일이지만 매우 어렵습...
폭풍을 만난 선장들은 배에서 가장 값이 덜 나가는 것들부터 바다에 내던지지요. 가장 값진 물건부터 내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외에는 그런 일을 못할 것입니다.
구멍 하나가 배를 가라앉게 만들 듯이, 하나의 죄가 죄인을 멸망시킵니다.
친구를 잊는 사람은 그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잊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무자비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내세의 행복을 바라는 자는 잡초 씨를 심고 나서 곳간을 밀과 보리로 채우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지요.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 자신이 임종할 날을 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와 수근거림은 세상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벼이 보시는 이 세상이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하나님께서 추천하시는 하늘 나라는 얼마나 더 가치 있겠습니까?...
숱한 괴로움이 수반되는 이 세상 삶도 우리가 포기하기 싫어하는데, 하물며 하늘 나라의 삶은 어떠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선함에 대해서는 목청을 높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바 하나님의 선하심을 외치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우리가 고기를 실컷 먹고도 남길 때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의 요구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가치와 의가 들어 있지요.”
말을 마친 해석자는 일행을 데리고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그는 한 나무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나무는 속이 모두 썩었지만 아직 자라면서 잎을 내고 있었다.
자비심이 물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해석자가 말했다. “겉은 훌륭하지만 속은 썩어 버린 이 나무는 하나님의 동산 안에 사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 칭송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위해 아무것...
4. 순례자들은 담대 씨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계속한다....
내가 꿈에 보니, 담대의 뒤를 따라가던 일행은 예전에 크리스천의 짐이 등에서 벗겨져 무덤 안으로 굴러들어가던 장소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크리스티아나가 말했다. “좁은 문에서 우리가 들은 말씀이 문득 생각나네요. 거기서 우리는 말과 행위로 용서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말이란 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요, 행위란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이라고 하였어요. 약속에 관해서는 약간 알겠는데,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한 용서는 잘 모르겠어요. 담대 씨,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알고 있을 것 같으니 제발 우리에게 그에 관해 말해 주십시오.”
담대: “행위로 용서 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용서함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용서를 성취해 준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분이 말씀하신 바 ‘내가 이미 성취한 방식으로’ 용서함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시켜 말하자면, 당신이나 자비심, 그리고 이 소년들은 다른 분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좁은 문에서 당신들을 영접하신 그분이십니다. 그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는데, 첫 번째는 당신들을 감싸 주시기 위해 의를 행하신 것이요, 두 번째는 당신들을 씻기시기 위해 피를 흘려 주신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나: “만약, 그분이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면 자신이 가지실 의는 어떻게 되나요?”
담대: “그분의 의는 너무나 풍부해서 당신들과 그분 자신에게 필요한 의를 제하고도 얼마든지 남습니다.”
크리스티아나: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담대: “기꺼이 그러죠, 하지만 먼저 전제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이 이 세상에서 결코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한 인격(person) 안에 두 가지 본성(natures)을 갖고 계십니다. 그 본성들은 쉽게 구별되지만,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본성들은 각기 의(義, righteousness)를 지니고 있으며, 각 의(義)는 그 본성에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본성을 그 의와 분리시키고자 하면 그 본성 자체가 사멸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그를 통해 살기 위해서는, 그 의가 하나든 둘 다이든 우리에게 입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의 이외에도, 그는 두 가지 본성을 한꺼번에 소유하신 분으로서의 의를 또 가지고 계십니다. 이 의는 인간과 구별되는 하나님으로서의 의가 아닙니다. 또한 이 의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인간으로서의 의도 아닙니다. 이 의는 두 본성의 연합(union) 가운데 존재하는 의인데, 그가 맡으신 중보자로서의 직무를 완수하는 데에 필수적인 의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첫 번째 의를 우리에게 나눠 주신다면 그것은 그의 신성(Godhead)을 나눠 주시는 것이요, 만약 그가 두 번째 의를 나눠 주신다면 그것은 그의 순결한 인간성을 나눠 주시는 것이요, 만약 그가 세 번째 의를 나눠 주신다면 그것은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함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또 다른 의를 가지고 계시는데, 이 의는 항상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적으로 행해집니다. 죄인들에게 입혀지는 의는 바로 이러한 의로서, 이를 통해 죄가 덮어
집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크리스티아나: “그러면 다른 의들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나요?”
담대: “소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물론 처음 두 가지 의는 그의 본성과 직무에 필수불가결한 의이기 때문에 남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지만, 이들 덕분에 죄인을 의롭게 하는 세 번째 의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신성의 의는 그의 순종을 낳고, 인성의 의는 그 순종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리고 두 본성의 연합 가운데 존재하는 의는 그의 직무에 권위를 부여하여 그가 맡으신 일을 온전히 행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 없이도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의 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 없이도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신인(God-man)으로서의 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의 없이도 그는 완전한 신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의나 신앙으로서의 의가 전혀 필요 없으므로, 얼마든지 이런 의를 비축해 두실 수 있지요.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해 주는 의는 그에게 필요가 없으므로 남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의의 선물’(롬 5:17)이라고 부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율법 아래서 나셨기 때문에, 이 의를 남에게 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에게 올바로 행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자선을 행하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자신에게 외투 두 벌이 있으면 그 중 하나를 옷 없는 자에게 마땅히 주셔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실제로 외투를 두 벌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요, 하나는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하나를 옷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나누어 주십니다.
크리스티아나와 자비심, 그리고 여기 있는 소년들이여, 이처럼 당신들이 용서를 받게 된 것은 다른 분의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은 당신들의 주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은 자신이 행하신 바를 처음 만나는 거지에게 그냥 주셨습니다. 그런데 행위로써 용서함을 받으려면, 우리를 덮어 줄 것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죄로 인해 의로운 율법의 공정한 저주 아래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우리가 저지른 해악을 보상할 대가를 치러 구속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 대가가 바로 주님의 피로써 치러졌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대신해 심판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범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피로써 여러분을 범죄로부터 속량하셨고, 의로써 여러분의 오염되고 일그러진 영혼을 덮어 주셨습니다(롬 8:34; 갈 3:13).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그는 이 피와 의를 보시고 여러분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실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나: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야 우리가 말과 행위로 용서받았다는 뜻을 좀 알겠습니다. 자, 착한 자비심 양, 이 뜻을 우리 마음 속에 아로새겨 두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얘들아, 너희도 이 뜻을 꼭 기억해라. 그런데 선생님, 제 남편 크리스천의 짐이 여기서 벗겨져 기쁨으로 세 번 뛰었다고 하던데, 그것도 이 때문이었습니까?”
담대: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그전에 어느 것으로도 끊을 수 없던 짐끈을 끊어 버렸던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이 이 십자가 앞까지 짐을 지고 오도록 만든 이유는 그에게 믿음의 힘을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크리스티아나: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에도 제 마음이 가볍고 즐거웠지만, 지금 제 마음의 상쾌함과 기쁨은 전보다 열 배나 더 커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별로 절실히 느끼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진 자라 할지라도 이 자리에 와서 지금 저처럼 깨닫고 믿게 된다면, 그의 마음도 한층 쾌활해지고 밝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담대: “이런 것들을 보고 깊이 생각하면, 짐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질 뿐 아니라 자상한 애정까지 우러나오게 되지요. 죄 사함이 언약으로만 아니라 십자가의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그 구속의 방법과 자기를 위해 구속을 이루신 분에 대한 사랑을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나: “옳은 말씀입니다. 주께서 저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생각할 때 제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아요. 아, 사랑의 주여!, 복되신 주여! 당신이 저를 사셨으니 저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당신이 제 몸값의 만 배도 더 되는 값을 치러 주셨으니 제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남편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 험한 길을 재빨리 달려간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나는 마음이 악하고 삐뚤어져 그를 혼자 보냈습니다. 아, 자비심 양, 당신의 부모님도 여기 계셨더라면, 그리고 겁쟁이 부인과 바람둥이 마님도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랬으면 틀림없이 그들의 마음도 변화를 받아 겁쟁이 부인의 두려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또 바람둥이 마님의 정욕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좋은 순례자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을 텐데요.”
담대: “당신은 지금 따뜻한 사랑의 감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지만, 그 감정이 늘 식지 않으리라고 여기십니까? 그리고 이러한 감격은 예수의 피 흘리심을 본다고 해서 누구나 다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흘리시는 피가 심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 곁에 서서 이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애곡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를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가 되는 대신 주님에 대해 마음을 완악하게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딸들이여, 당신들이 이 모든 은혜를 받게 된 원인은 내 말을 진지하게 받고 묵상함으로써 특별한 인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암탉이 일반적인 부름을 부를 때는 병아리들에게 아무런 먹이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당신들이 감격을 느끼는 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5. 순례자들은 곤고의 산에 올라 사자를 지나서 아름다움의 집에 도달한다....
6. 쾌활 씨가 자비심에게 청혼을 하고, 마태가 앓다가 회복된다....
그래서 병에 걸렸던 마태가 그녀에게 물었다. “대개 약은 우리 입에 쓴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분별: “그건 하나님의 말씀과 그 효험이 육신적 마음에는 기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거지.”
마태: “약이 몸에 좋다고 하면서 왜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는거죠?”...
7. 순례자들이 겸손의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이에 담대 씨가 답변했다.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죄인들을 설득해 회개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이끌라는 명을 받았다. 만약 이로 인해 네가 시비를 건다면 얼마든지 오너라. 겨루어 주마.”...
8. 순례자들은 정직 씨를 만나 그 자신의 체험과 두려움 씨의 체험을 듣는다....
담대 씨가 말했다. “아니요, 살에 조금 상처를 입은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 상처는 나에게 해를 주기는커녕, 현재에서는 주인님과 당신들에 대한 내 사랑의 증거가 되고, 장래에는 은혜로 내 상급을 더욱 크게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나: “그런데 선생님, 거인이 철봉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볼 때 무섭지 않으셨어요?”
담대: “내 자신의 능력이나 수완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신 분을 의지하는 것이 내 의무지요.”
크리스티아나: “그의 첫 공격에 땅에 꿇어 엎어지셨는데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담대: “예, 내 주인님께서도 처음엔 쓰러지셨지만 결국 승리를 거두셨다는 생각을 했지요”(고후 4장).
마태: “선생님께서 나름대로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데, 저는 그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하게 도와주시고 특히 그 흉악한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제가 보기에,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져 내심으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히 증거해 주셨으니까요.”...
두려움씨
게도 괴로움을 주었던 것입니다(시 88편). 그는 누구보다도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남에게 해 끼치는 일을 너무나 두려워했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허용된 일도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금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롬 14:11; 고전 8:13).
정직: “그런데 왜 그렇게 착한 사람이 평생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갔을까요?”
담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현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피리를 불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애곡을 해야 하지요(마 11:16, 18). 말하자면 두려움 씨는 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었지요. 그와 그의 동료들은 저음을 내는 나팔을 연주하였는데, 그 나팔의 음색이 다른 악기에 비해 더 음울했던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베이스가 음악의 기초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나는 무거운 마음의 느낌 없이 나오는 신앙 고백을 결코 신뢰하지 않습니다. 음악가가 음을 고르게 맞추고자 할 때 가장 먼저 건드리는 현은 대개 베이스 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영혼을 그의 음조로 맞추고자 하실 때 가장 먼저 이 현을 건드리십니다. 다만 이 두려움 씨의 문제점은 그가 끝까지 베이스 외의 다른 현은 연주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은 젊은 독자들의 이해를 성숙시키려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음악가 무리로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보좌 앞에서 나팔과 수금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계 8:2; 14:2)...
이때 크리스티아나가 말했다. “두려움 씨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나와 같은 이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착한 사람과 저 사이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다만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네요. 그는 그 큰 괴로움을 밖으로 표현한 데 반해, 나는 그것을 속에 간직하였지요. 그리고 그는 괴로움에 짓눌려 감히 들여보내 달라고 문을 두드리지 못한 반면에, 나는 괴로움으로 인해 더 크게 문을 두드렸지요.”
자비심: “저도 한 말씀 드릴까요? 제게도 두려움 씨와 같은 문제가 있었어요. 낙원을 잃어버리고 불못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이 세상 다른 것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보다 몇 배 더 컸어요. 아, 천국에 거하는 행복만 얻을 수 있다면, 세상 온갖 것을 다 버려도 좋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그러자 마태가 말했다. “제 마음에도 항상 두려움이 깃들어 있어서, 구원과 관계되는 감정을 가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두려움 씨 같이 좋은 분도 그런 두려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니 저도 걱정할 것이 없겠어요.”
야고보가 말했다. “두려움이 없으면 은혜도 없지요. 지옥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항상 은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는 분명 은혜가 있을 수 없어요.”
담대: “잘 말했다. 야고보야, 네가 정곡을 찔렀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했거든. 분명히 단언하건대, 근본이 없는 자는 중간이나 끝을 소유할 수 없지. 자,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두려움 씨에 관한 이야기를 결론짓도록 하자....
9. 자의 씨의 성품...
정직: “그는 사람이 순례자들의 공덕뿐 아니라 악덕을 따라도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지요. 그 두 가지를 다 행할지라도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담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순례자들의 공덕뿐 아니라 악덕에 참여하는 죄를 지을 수 있지요. 만약 그가 이런 뜻으로 말했다면 별로 비난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악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우리는 조심도 하고 노력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의 주장은 이런게 아닌 듯하군요. 제가 올바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은 그가 악을 그대로 용납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정직: “예, 바로 그 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실천합니다.”
담대: “도대체 그는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합니까?”
정직: “글쎄 그는 성경이 자기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겁니다.”
담대: “제발, 정직 씨.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해 주십시오.”...
정직: “그러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던 다윗이 다른 사람의 아내와 동침한 사건을 지적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솔로몬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렸으니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사라와 애굽의 경건한 산파들과 라합 등이 거짓말을 했으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듣고 남의 나귀를 끌어왔으니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속임수와 꾀로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챘으니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담대: “너무나 상스러운 생각이군요. 그가 정말 그런 주장을 했습니까?”
정직: “나는 그가 성경을 세세하게 들춰가며 주장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습니다.”
담대: “도저히 세상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억지 이론입니다.”
정직: “제 말 뜻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아무 사람이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일을 행한 성경의 인물들처럼 덕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와 동일한 일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담대: “하지만 그런 엉터리 결론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마치 어떤 선한 사람이 계속 잘 해오다가 한 번 실수로 죄 범한 것을 보고는, 자기도 일부러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지요. 또한 한 어린아이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혹은 돌에 걸려서 진창에 넘어져 옷을 버린 것을 보고는, 자기도 고의적으로 그 안에 넘어져 돼지처럼 뒹굴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정욕의 힘에 의해 눈이 가려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그리고 경건한 자들의 악덕에 참여한다 해서 그들의 공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그의 가정은 앞의 주장 못지않게 허황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 것이(호 4:8) 결코 그들의 공덕을 소유한 자의 표시는 아닙니다.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지금 사랑이나 믿음이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당신도 물론 그 사람의 이론을 강력히 반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당신의 반박에 무슨 변명을 합디까?”...
정직: “예, 그는 자기 의견에 반대되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어쨌든 자기 의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고 하더군요.”
담대: “참 고약한 대답이군요. 우리가 그런 정욕을 마음으로 거부하면서 어쩌다가 정욕에 빠지는 일도 나쁜데, 일부러 죄를 짓고 정욕을 용납하는 일은 더욱 나쁘지 않겠어요? 앞의 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뜻하지 않게 비틀거리게 하지만, 뒤의 일은 그들을 함정으로 이끕니다.”
정직: “이 사람처럼 말은 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지요. 이 때문에 사람들이 순례 생활을 소홀히 여기는 거죠.”
담대: “옳습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낙원에 계신 임금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두 그에게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나: “세상에는 참 이상한 의견들이 많아요. 죽을 때가 임박해서 회개해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으니까요.”...
담대: “그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주일 동안 백 리 길을 달려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지시가 내려졌는데, 만약 그가 일주일의 마감 한 시간 전까지 여행을 미룬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정직: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순례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보다시피 나는 노인으로서, 오랫동안 이 길을 여행하며 많은 일을 겪고 또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마치 온 천하를 휘어잡기나 하려는 듯이 덤비다가 며칠 안 돼 그만 광야에 쓰러져 약속의 땅을 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처음에는 아무 약속도 못 받고 순례자가 되어 하루도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여겨지던 사람이 결국 훌륭한 순례자가 되는 것도 보았지요. 어떤 사람은 앞으로 급히 내닫다가 잠시 후에는 다시 뒤로 급히 돌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순례자의 생활에 대해 매우 좋게 이야기하다가, 얼마 후에는 정반대로 이야기하지요. 제가 듣기에,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낙원을 향해 출발할 때는 긍정적으로 ‘그런 곳이 있어’라고 말하다가, 천국에 거의 다 와서는 ‘그런 곳은 없어’ 하며 돌아서기도 한답니다. 또...
자기의 순례길을 막는 자가 나타나면 해치워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떠난 어떤 사람들이 거짓된 경고에 놀라 믿음과 순례의 길,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는 소식도 들었지요.”...
10. 순례자들이 가이오의 집에 도착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제가 또 말하건대, 구세주가 오셨을 때, 천사나 남자들보다 더 앞서 기쁨의 소식을 들은 이들은 여자였습니다(눅 2장). 성경을 읽어 보면, 남자들은 그리스도께 동전 한 닢 갖다드린 적이 없지만, 그를 따르는 여자들은 자기 재물을 다 바쳐 그리스도를 공양하였습니다(눅 8:2, 3).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은 자도 여인이요, 예수의 장례를 위해 그의 몸에 기름을 부은 이도 여자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슬피 운 것도 여자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뒤따라간 것도 여자요, 그가 장사되실 때 무덤 곁에 앉았던 이도 여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아침에 그를 맨 처음 본 사람들도 여자였고, 그가 부활하신 소식을 제자들에게 처음 전해 준 사람도 여자였습니다(눅 7:37, 50; 23:27; 24:22, 23;요 2:3; 11:2; 마 27:55, 61).
그러므로 여인들은 많은 은총을 받고 있으며, 앞의 일들에서도 나타나듯이, 여자들은 남자들과 더불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11. 순례자들은 계속 가이오의 집에 머물다가, 거기서부터 원정을 나가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 살선을 죽이고 심약 씨를 구출한다....
“남을 죽이려 하는 자는 먼저 정복을 당해야 하고,
밖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집 안에서 죽어야 한다.”...
“죄를 죽이려 하는 자는
먼저 은혜로 정복을 당해야 하고,
살아 있음을 남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
가이오가 말했다. “옳습니다. 참 좋은 가르침이지요. 제 경험이 이를 입증합니다. 은혜가 나타나 그 영광으로 영혼을 정복하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죄를 가리켜 영혼을 얽어매는 사탄의 밧줄이라고 할 때, 그 결박에서 풀려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탄에게 저항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사리에 밝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패에 종이 되어 있는 자가 은혜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물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말이 난 김에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릴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아마 들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남자가 순례길을 떠났는데, 한 사람은 아직 젊었고 한 사람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젊은이는 싸워서 꺾어야 할 부패한 마음을 많이 갖고 있었고, 노인은 몸이 노쇠함에 따라 그런 마음도 약해져 있었지요. 젊은이는 노인과 함께 꾸준히 그의 발걸음을 내딛었고, 모든 길을 노인과 함께 가볍게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이 똑같이 보이는데, 과연 누가 더 은혜의 빛을 강하게 발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직: “물론 젊은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큰 적수와 싸워 나간다는 것은 가장 큰 투쟁력을 과시하는 셈이 되니까요. 특히 그가 자신의 난관에 비해 절반도 못되는 난관과 싸우는 노인과 발걸음을 맞추어 행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반면에 저는 종종 노인들이 엉뚱하게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을 보았지요. 그들은 나이 먹어 자연적으로 정욕이 감퇴된 것을 가지고 자기가 죄악과 싸워 이긴 것처럼 여기곤 하죠. 하지만 실제로 은혜를 많이 받은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충고의 말을 잘 해 줄 수 있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만사가 헛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순례의 길을 가게 될 때, 노인은 부패한 마음이 자연적으로...
약화되어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은혜의 힘을 잘 깨닫지 못하는 반면, 젊은이는 그 힘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지요.”...
12. 순례자들은 주저 씨를 만나 함께 허영의 도시로 향한다. 거기서 그들은 나손 씨의 집에 머물면서 뜻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난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괴물과도 대면한다....
13. 순례자들은 거인 절망과 그의 아내를 죽이고 그의 성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그리고 기쁨의 산으로 나아간다...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진흙을 던져도 잠시 뒤 흙은 모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고, 그의 의복은 다시 흙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졌다.
이에 순례자들이 물었다. “저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자들이 대답했다. “저 사람의 이름은 신실(Godly-man)인데, 그가 입고 있는 흰 옷은 그의 생활의 결백함을 보여 주지요. 그에게 진흙을 던지는 자들은 그의 착한 행실을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흙은 조금도 그의 옷에 묻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진정 결백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에게 더러운 누명을 씌우려 해도 헛수고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금방 그들의 결백을 빛나게 하시고 그들의 의로움을 대낮처럼 밝게 만드실 테니까요.”...
그리고 나서 목자들은 일행을 자애의 산(Mount Charity)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는 어떤 사람이 옷감 한 필을 앞에 놓고는 자기 주위에 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겉옷과 속옷을 끊어 주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옷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순례자들이 물었다.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목자들이 말했다. “가난한 자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핍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물을 주는 자는 자신도 물을 얻게 됩니다. 옛날 한 과부가 선지자에게 떡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과부의 밀가루 그릇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습니다”(왕상 17:16).
목자들은 일행을 데리고 또 다른 곳으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바보(Fool)라는 사람과 팔푼이(Want-wit)라는 사람이 흑인 에티오피아인 하나를 씻겨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흑인을 희게 만들려고 씻고 있었지만 그들이 씻기면 씻길수록 흑인은 더 검어졌다. 이를 보고 그들은 목자들에게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목자들이 말했다. “이는 악한 인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아무리 선한 명성을 부여하려고 해도 결국은 더 혐오감만 주기 마련이지요. 과거에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모든 위선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이때 마태의 아내인 자비심이 시어머니 크리스티아나에게 말했다. “어머니, 가능하다면 흔히 지옥행 샛길이라고 부르는 저 언덕의 구멍을 보고 싶은데요.”
시어머니는 목자들에게 그녀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러자 목자들은 언덕 옆에 있는 문으로 가서 그것을 열고는 자비심에게 잠시 동안 귀를 기울여 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문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 있자니 이런 소리가 들렸다. “평화와 생명의 길에서 내 발을 돌이키게 만든 아버지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다른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아, 내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과 영혼을 살렸어야 했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내가 만약 다시 살아난다면 나 자신을 부인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테야.”
그러더니 자비심이 서 있는 아래 땅이 흔들리며 두려움으로 떠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이곳에 빠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목자들은 이 모든 것을 다 보여 준 후에 그들을 다시 궁전으로 데리고 와서 그 집의 음식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자비심은 거기서 본 물건 하나를 무척 가지고 싶었으나 아직 젊고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부끄러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불편해하는 기미를 눈치 챈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비심이 말했다. “식당에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기에 자꾸 마음이 끌려요. 그걸 갖지 못하면 꼭 아기를 유산할 것 같아요.”
시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그걸 가지고 싶어 한다고 목자들에게 말해 주마. 아마 안 준다고 하지는 않을거다.”
자비심: “하지만 그들에게 욕심을 알리는 것이 부끄러워요.”
크리스티아나: “아니다, 내 딸아. 그러한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오히려 덕이란다.”
자비심: “그러면 어머니, 목자들에게 그것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봐 주세요.”...
14. 일행은 진리의 용사 씨와 불굴 씨를 만나 합류한다. 그리고 마법의 땅을 지난다. 물거품 마님에 관한 언급...
그가 칼을 주자, 이를 받아들고 잠시 살펴보던 담대가 말했다. “아하, 이것은 올바른 예루살렘의 검이군요.”
진리의 용사: “그렇습니다. 누구든 손에 이 검 한 자루와 이를 다룰 수 있는 기술만 갖고 있으면, 감히 천사들과도 겨뤄볼 수 있지요. 어떻게 내리치는 줄만 알면 결코 이 칼을 잡는 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칼날은 무뎌지는 법이 없으며, 살과 뼈뿐 아니라 영과 혼까지도 찔러 쪼갤 수 있지요”(히 4:12).
담대: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시고도 피곤해하지 않으시니 이상하군요.”
진리의 용사: “나는 칼이 내 손에 붙을 정도로 싸웠지요(삼상 23:10). 칼은 마치 내 팔에서 돋아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피가 손가락을 통해 거기까지 흐르는 것 같아, 피곤함도 모르고 용기있게 싸웠습니다.”
담대: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셨군요(히 12:4). 이제 우리와 같이 거하면서 함께 출입합시다. 우리는 당신의 친구들입니다.”...
이들을 본 순례자들은 걸음을 멈추고 가련한 생각에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 잠자는 자들을 그냥 두고 갈 것이냐 아니면 가서 그들을 깨울 것이냐에 관해 의논을 하였다. 결국 그들은 두 사람에게 가서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깨우되 정자의 의자에 앉거나 그외의 편의 시설에 몸을 기대지는 않도록 주의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자 안에 들어가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안내자는 그들을 전부터 알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말을 걸었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안내자는 그들의 몸을 흔들며 여러 방법으로 그들을 깨우려 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하나가 말했다. “내게 돈이 생기면 갚아줄게.”
이 말에 안내자는 머리를 저었다.
다시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칼을 쥐고 있을 힘이 있는 한 나는 끝까지 싸울테다.” 이 말을 듣고 소년 중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티아나가 말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안내자가 말했다. “잠꼬대를 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이 아무리 때리든 찌르든 무슨 짓을 해도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예전에 바다 물결이 그를 때리는데도 갑판 위에서 잠을 자며 ‘잠이 깨면 다시 술을 찾겠다’고 말하던 사람과 같지요(잠 23:34, 35)....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잠꼬대를 하면서 여러 가지 말들을 하지만, 그 말들은 믿음이나 이성에 의해 나오는 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순례길을 가는 것과 여기 앉아 쉬는 것 사이에 일관성이 없듯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부주의한 사람들이 순례길을 가면 십중팔구는 이런 꼴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마법의 땅은 순례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의 마지막 피신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순례길의 거의 끝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곳은 우리 원수들에게 더 유리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들이 보기에, 이 바보들이 오랫동안 길을 걸어 왔으니 지쳐서 앉아 쉬고 싶겠지, 여행이 거의 끝났으니 정신 상태가 해이해지겠지 하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마법의 땅은 순례 경주의 종착점인 쁄라의 땅(land of Beulah)에 아주 가까이...
불굴: “아, 그러니 내가 그녀를 거절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날 어디로 끌고 가려 했을까요?”
담대: “어디인지는 하나님 외에 알 사람이 없지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그녀는 당신을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뜨려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딤전 6:9). 그녀는 압살롬을 꾀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게 했고, 여로보암을 꾀어 주인을 거역하게 했습니다. 또 유다에게 주님을 팔아 넘기게 하고, 데마를 유혹해 경건한 순례 생활을 버리게 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그외에도 그녀가 끼치는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임금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시키는 자도 그녀요, 부모와 자식들 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도 그녀요, 이웃과 이웃을, 남편과 아내를 불화하게 만드는 것도 그녀요, 한 인간 속에서 육체와 정신을 이간시키는 자도 그녀입니다. 그러니 착한 불굴 선생님, 당신은 당신의 이름대로 살아서 ‘모든 일을 마친 다음에 굳게 서시길’ 바랍니다.”
이 대화를 듣는 순례자들은 두려움과 기쁨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이러한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걸었다....
15. 순례자들이 쁄라 땅에 도착하여 거기서 왕의 부르심을 기다린다. 크리스티아나와 몇몇 친구들이 강을 건너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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