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당하시는 예수님 8:48~51

죄의 종은 진리를 알지 못하며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며 비난합니다(48절).

이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4:9).

또한 ‘귀신 들렸다’고 비난합니다(48절).

이는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신을 그들이 무시한다고 하십니다(49절).

‘무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티마조’는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헐뜯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는 대적자들의 행동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 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공경하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십니다(50절).

그리고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절)라며 영생에 관해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모욕했나요?

예수님의 신성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조롱한다.

예수님의 신성은 오직 그분께서 나에게 찾아오시고 친히 그 신성을 내게 내비치시며

오직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교만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그 분을 모욕하고 조롱하였는데,

주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너는 인간이다. )

그분을 수치스럽게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신성 모독죄로 몰아갔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사람이 되어서 어찌 하나님이라 하냐고 따졌다.

기사와 이적 표징을 보일때, 귀신들려서 귀신의 힘을 사용한다고 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때, 조롱하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며 조롱했다.

유대인들의 왕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웃으며 조롱하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도 며 희롱한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죄가 없다고 선언했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더욱 강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한다.

“이 사람을 없애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누가복음 23:18)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요한복음 19:6)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며 그분의 신성을 부정하고,

심한 모욕과 조롱을 퍼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과 인내로 이를 감당하시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예수님의 이 사랑과 용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다.

상대방을 선한 의도로 대했는데 오히려 모욕을 당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선한 의도로 대할지라도 우리는 모욕을 받고 조롱을 당하고 치욕을 받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시련이 아닐까 싶다.

이미 날때부터 우리는 왜곡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마냥 살아왔었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지라도, 회피하고 사랑을 거부하고 천국을 거부한다.

내가 참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기 이전에 그러하였듯,

너무 이해가 된다 불신자들의 반응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길 간절히 바란다.

믿는 사람들이라고해서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를 친히 말씀으로 성령충만으로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길 간절히 바란다.

믿는 자들이라고 해서 슈퍼맨 예수님이 아니다.

이 연약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께만 영광.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친히 전할지라도, “나는 조작된(만들어진) 신의 무한한 사랑 따윈 필요없다, 내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신을 정복한 아담이다, 신을 배반한 아담으로 내가 즉 신이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교만으로 되값고, 모욕을 당하고,

독선적인 기독교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해서 듣는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종교를 가지지 않습니다.

지성인이라면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면 나는 지옥가고 말겠다라고 호언 장담하는 것이 불신자들의 기본 포지션이다.

이 땅에서 내 멋대로 방탕하게 살고 그 담에 죽어서 심판이든 방탕이든 뭐든 한 몸으로 받겠다는 그 교만…

지옥가면 누가 쾌락을 즐기게끔 둔다고 하였는가? 지옥이 영원한 파티와 쾌락과 엑스터시가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지옥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형벌과 영원히 불타는 불못에서 계속 해서 고통 받는 것이 불신자들의 정해진 심판이다.

그러면서 또 투덜거린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며? 근데 왜 지옥보내냐? 그건 사이코패스이다. 라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한다.

죄와 사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이 아니라고 말리는 것이 사랑이다.

나쁜 것을 뻔히 알면서 더욱 그 길로 부추기고 가만히 냅두는 것은 방종 혹은 방임이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구해주고 건져주는 것이 사랑이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완전히 정 반대로 움직인다.

마치 부자가 천국을 못 가는 것과, 삭개오가 회개해서 재산을 나눠준 것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 처럼,

하나님의 선한의도는 이처럼 우리들에게 전달 될 때에, 공격받기 쉽고, 성령 충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에게 공략 당하기 쉽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는 절대적이지만,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에게 찾아올때 그것을 왜곡하고 곡해시키는 것이 마귀의 역할이다.

같이 지옥가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마귀이다.

예수님 처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스데반 집사님 처럼, 저들은 자기가 어떤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자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성령 충만하면 기도 할 수 있다.

두렵지만 담대히 할 수 있다. 지금 이 땅에서의 고통은 잠시뿐이지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과 그를 찬양하는 거룩과 영광의 자리는 영원하다.

모욕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우리의 방어기제가 발동해서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항상 온유함과 인내로 반응하신다.

억울한 감정을 붙잡고 있으면 원망과 분노가 자라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롱받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하셨다. 억울함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베드로전서 3:9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셨다. 내가 받은 대로 되갚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갚아주신다.

예수님은 어떤 때는 침묵하셨고(마태복음 26:63), 어떤 때는 분명히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8:23).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조롱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변명하거나 감정을 쏟아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 말해야 할 상황이라면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억울함을 사람이 풀어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다스리신다. 시편 37:5-6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하셨다. 내가 억울함을 참으면 하나님이 대신 신원해 주신다.

상대가 나를 모욕할 때, 내 안에서도 교만이나 연약함이 드러날 수 있다. 이때 억울함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상황을 통해 나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낮추고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회로 삼는다.

결국,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답이다. 억울함 속에서도 묵묵히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인내와 온유함이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된다.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예수님 8:52~59

예수님을 유한한 존재로 알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한한 존재로 여겼기에 조상 아브라함과 비교하며 예수님 말씀을 거부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보리라 기대했고, 마침내 보고 기뻐했다고 하십니다(56절).

그리고 아브라함 전부터 존재한 자신의 신적 기원을 알리십니다(58절).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으로 여겨 돌로 치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십니다(59절).

‘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수동태로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숨겨져 성전에서 나가신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선언하셨기 때문

그들은 이를 신성 모독으로 여겼고, 율법에 따라 죽이려 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하셨고,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라며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고 율법 (레위기 24:16) 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 했다.

레위기 24:16 KRV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

아브라함보다 전에 자신이 존재한다고 하셨다.

스스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선안한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다.

안식일을 범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정치적 왕으로 와서 로마를 무너뜨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사함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들의 교만과 외식적인 신앙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요한복음 8:44) 이런 말씀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는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신의 신성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며, 스스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고,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이는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 과정이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혹은 일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내가 과연 유대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았었어도 그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선포했을까? 나를 택하신 예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인간은 환경과 장소 시간에 많은 제약을 가지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풍족한 사회에서 편하게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마주할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단코 속단하지 않는다. 인내한다.

모든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 즉시 판단하거나 화내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먼저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서 1: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와 연약함에도 참고 가르치셨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도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는 과정일 수 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편 37:5)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누가복음 22:42)라고 기도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구해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바꾸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예수님은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누가복음 23:34).

이해되지 않는 일이 생길 때, 불평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대할 때, 억지로라도 사랑을 실천하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한 가룟 유다에게조차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며 행동해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형들을 용서했다 (창세기 50:20).

즉,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신뢰하는 것이 답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일을 만났을 때,

속단하지 않고 인내하며,

내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로 맡기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록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안전은 스스로 만든 안전장치로 인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약속으로 인해 보장되는 것이다. - 루시 쇼

타협 없는 진리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에 대해 어떤 타협도 하지 않으셨다. 반면 여러 민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늘 타협하고 인간의 입맛에 맞게 변형을 꾀했다. 로마와 그리스의 신들이 모두 그렇게 했으며, 구전 설화 속의 신들도 자주 그렇게 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 외에는 어떤 하나님도 있을 수 없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결코 스스로 타협하실 수 없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는 ‘성육신’ 역시 신성의 어떤 타협 없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신성을 타협함으로써 스스로 강등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으로 남으시고,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남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도 그 간극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에게로 끌어올리셨다. 하나님은 폄하되지 않고 인간이 격상된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의 경이로움이다!

이렇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은 약속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신다.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은 영원한 효력을 지닌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은 다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게 되었다. 기독교의 신학은 얼마나 놀라운가!

토저의 사도신경 읽기 / A. W. 토저_ 두란노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니 너무나도 편합니다.

물론 제가 힘내야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 있고

나는 굳게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주께서 저를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하사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듯 하도다 아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선포하시고,

자신을 낮추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며 배척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비난하며

귀신들렸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모욕과 멸시 속에서도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며, 영생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역시 이 세상에서 선한 의도를 품고 대할지라도,

때로는 모욕을 당하고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상황 속에서 감정이 흔들리고 분노가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온유와 인내를 본받아,

나 자신을 변호하기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참고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욕당하시고 조롱받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를 본받아, 나를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억울함을 사람이 풀어줄 수 없을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다스리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편 37:5-6) 하신 말씀처럼,

내 억울함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게 하소서.

아버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게 하소서.

세상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며 조롱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나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어떠한 조롱과 모욕 속에서도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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