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생명의 빛 8:12
초막절에는 물과 더불어 ‘빛’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초막절 내내 성전 안 여인의 뜰 네 모퉁이에 있는 큰 금등잔에 불을 밝힙니다. 이 불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방을 환하게 밝힙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빛의 조명 행사 때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12절). 이는 ‘생명의 떡’(6:35)에 이어 예수님이 두 번째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빛 혹은 또 다른 빛이 아니라 유일한 ‘참빛’이십니다(1:9).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고 ‘빛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삽니다.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때는 언제였나요? 내게 있는 어둠의 속성은 무엇이며, 이를 물리칠 방법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 이유 8:13~20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증언의 신빙성을 위해 두세 사람의 증언자가 있어야 한다는 모세 율법을 내세웁니다(신 17:6; 19:15). 홀로 증언하심에도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 이유는 첫째, 예수님의 존재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14절). 둘째,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며, 그렇게 해도 하나님과 함께 판단하시기에 그분의 판단은 옳습니다(15~16절). 셋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예수님과 더불어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17~18절). 예수님이 ‘헌금함 앞’ 곧 여인의 뜰에서 공개적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20절) 여자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던 당시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연결시키신 것으로 봅니다. 완고한 마음에는 빛의 생명이 거할 수 없습니다.
적대적인 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을 어떻게 변론하셨나요? 주님 말씀에 대한 거부감이 내게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안의 빛 되신 예수님께로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 질문에 응답자의 약 40%에 해당하는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정신 건강에 대한 설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성도의 60% 정도가 평소에 불안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마음의 평안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안은 사실 모든 인간의 실존이다. 그 시작은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당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은 진리의 빛을 잃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벼랑 끝과 같은 세상을 살게 되었다. 낭떠러지에 선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서라도 자신이 살고자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면서까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친다.
우리는 불안을, 빛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빛이신 주님 앞에 가기 전까지 인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갓 태어난 아기가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며 우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 세상은 온통 어둠과 불안뿐이다. 인간은 빛이신 주님과 연결될 때에만 평안할 수 있다.
춤추는 고래는 행복하다 / 류인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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