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가 주님께 받은 책망은 무엇이었나요?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면에서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칭 선지자라 주장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일로 책망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를 들여온 장본인입니다.

그 여인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양성했으며, 우상 숭배와 성적 부도덕으로 백성을 현혹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0년 후 구약성경의 이세벨 같은 존재가 두아디라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들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당시 두아디라에는 각종 길드(조합)가 있었는데, 길드에 소속되지 않으면 생업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길드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음행이 우상 숭배의 일부였습니다. 이세벨에게 미혹된 두아디라 교회는 진리와 성결을 잃었습니다.

생업과 연결되는 일이 진리와 성결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업과 연결되는 일이 만약 나에게 그런 일로 다가온다면, 단호히 거절해야한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라고 단호히 거절하고 나와야한다.

그리고 만약 회사에서 그런 것을 은근히 강요하거나 원한다면, (영업의 이유로?)

어렵게 들어간 회사일지라도 나가야 한다.

아무리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해도, 영혼을 더럽히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은 무수히 많이 있다.

더 좋은 자리를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실 것이다.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인가요?

이세벨에게 미혹되지 않은, 남은 자들이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재림의 날까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끝까지 지키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십니다(26절).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철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듯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할 것입니다(27절; 시 2:9).

그래서 마지막 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세력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새벽별을 약속하십니다(28절).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시며 광명한 새벽별이십니다(22:16).

이기는 자는 새벽별의 권세와 영광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적 지위와 통치권을 누릴 것입니다(3:21; 5:10).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면 주님은 내게 어떤 상급을 주실까요?

썩지 않는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1. 썩지 않는 면류관 – (고린도전서 9:24-25)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훈련 받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 기쁨의 면류관 –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3. 의의 면류관 – (디모데후서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4. 영광의 관 –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생명의 면류관 – (요한계시록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의 가장 큰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그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급을 원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상급을 위해서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존재 목적 자체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주신다면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좁은 길이 승리의 대로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인의 67%가 “절대적 진리는 없다.”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절대적 진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편협하고 관용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비단 미국 내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기독교적 가치관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도덕적 가치가 중립적이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에 대한 절충과 용납이 필요하다는 말은 얼핏 그럴듯해 보입니다. 어제오늘 얘기도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른 기준도 있다고 속이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면 좋지 않겠냐고 회유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신앙은 상대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고는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바알을 숭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이냐, 바알이냐’이지 ‘하나님과 바알, 둘 다’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리이심을 외치는 것은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온전함과 거룩함을 향한 좁은 길은 승리의 대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 / 박신일_ 두란노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직 절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오늘도 내가 모르게 저지르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을 주세요.

불의를 참게하시고, 기도하게 하소서.

오직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니 마음이 편합니다.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게 하시고 내 안의 불편한 마음은 예수님께 드립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게 하시고 예수님 박해 당한 것 생각하며 억울함을 마음에 품지 않도록 하소서.

나를 괴롭히는 자를 용서하는 마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3 : 7~13  (0) 2024.11.24
요한계시록 3 : 1~6  (0) 2024.11.23
요한계시록 2 : 12~17  (0) 2024.11.21
요한계시록 2 : 1~11  (2) 2024.11.20
요한계시록 1 : 9~20  (2) 2024.11.19
블로그 이미지

잉비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