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산 사건을 전해 들은 이세벨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도 구경꾼에 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합이 그러합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목격하고도 그는 아내 이세벨에게 사건의 경위만 전할 뿐 하나님이 참신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일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이세벨(2절)을 막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다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합니다. 그는 갈멜산에서의 승리 후 왕이 변화되고 영적 부흥이 일어나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기대가 좌절되면 더 깊은 절망에 빠지는 법입니다. 수백 명의 이방 선지자와 싸워 승리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좌절과 두려움에 빠지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습 퀴즈>>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죽인 선지자의 수는? → 아세라 선지자 400명은 안와서 450명 이라고함.
(왕상 18: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왕상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심경은 어떠한가요?
무조건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뜻이라면 무조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고 그 깊이가 무한하시며, 지존하신 사랑을 내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실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하게 되는 이 지옥 같은 현생을 살고 있지만,
항복 + 회개 = 회복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준비하지만, 주께서 아니 하실지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지면 기대하지 않아도 주십니다.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매일 준비하며, 매일 은혜와 사랑, 찬양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대한 기대는 사실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기대의 어원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Expectation 즉 “ex → out”
Spectare “to look at, to watch” → 바라보다, 기다리다. 영어도 동일합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과 기대하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오랜 기대와 확신으로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의와 고집, 내가 형통하기를 바래서 그런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 뜻대로 잘 되면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그게 심지어 내 욕망에 따른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결말은 결국 패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작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그 뜻을 간구하면, 다른 것은 부산물로 거저 주십니다. 이것은 제 확신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백퍼센트, 이백퍼센트, 삼백퍼센트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될 것입니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어봤자 결국 허무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냥 포기했습니다. ‘아, 그냥 그러려니 하자, 포기하자.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TV가 꺼지듯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살다 갈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역전시켜 주신 분이 계십니다.
제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준비한 것들이 스스로 깨닫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나름의 철학과 가치관, 세계관이 점점 정립되던 시기였습니다.
공자는 30세를 ‘이립’이라 하여 이치가 서는 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으며 오십쯤 되어야 하늘의 뜻을 안다고 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니 가화만사성이니 이런 것들을 유교든 불교든 닥치는 대로 수행하고자 했습니다. 뇌과학이니 자기개발이니 책 많이 읽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줄 착각했습니다.
아무튼 포스트 모더니즘의 마음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것으로 친구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책 만 권을 읽느니 잠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 낫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부서지며, 매일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제가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은혜와 축복의 시간들…
그래서 이 질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준비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심경은 어떠한가요?’를 묻기 이전에,
그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나요? 이것을 먼저 물어봐야 합니다.
혹시 그 기도가 내 소욕과 욕심, 내가 주인 되어서 스스로 나를 우상숭배하고 신이라 착각하며 능력 없는 나에게 구한 것이 아닌가요? 라고 되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심경이 중요한가요? 옆에 계신 성령님과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요? 오랜 기도와 확신으로 준비한 것이 정말 효율적인 기도였는지 생각해봅니다. 정욕으로 기도하면 하나마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그 기도를 고쳐주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지, 본인 스스로에게 기도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항상 첫사랑을 기억하고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합시다. 잘합시다. ^_^
그럼 기도가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뜨거운 첫사랑이 없다면 요3:16 암송하면서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 오시기를 간구합시다.
주여 다시 속히 성령충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다시 부어주세요.
모든 기도의 끝은 중보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나에게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두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기도는 남을 위해 해야 함을 오늘도 성령께서 알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 무궁하길 소망합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요~ 합력해서 ~ 선을 이루어요~
언제나 나를 향한 신실한 사랑~
우리르 향한 그 크신 사랑~
우리가 함께 높이며 주를 찬양해~ 할렐루야 하나님꼐 영광~
하나님은 절망한 엘리야를 어떻게 위로하시고 일으켜 세우셨나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절망에 빠져 잠든 엘리야를 위로하십니다. 전에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주셨던 양식을 이번에는 천사를 통해 주십니다. 엘리야는 두 번이나 천사가 마련해 준 음식을 먹고 아주 멀리 호렙산까지 갑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의 다른 이름으로,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동굴에 숨은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절)라고 물으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엘리야가 자신의 답답한 속내를 풀어내도록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열정, 고립감, 죽음의 공포, 억울함 등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위로자요 상담자십니다.
내가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위로해 주셨나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신다고 항상 위로해주십니다.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십니다. 항상 눈동자같이 나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옆에서 근심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이런 저를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셨는데도 저는 아직도 고쳐지지 않네요.
오늘도 십자가 보혈로 저를 정케 해주시길 바랍니다.
- 브라이언 박 목사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냥 교회만 다니는 종교인으로서 교회만 다니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저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전혀 안 나오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오히려 저의 언행 으로 하나님을 오해 시키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너무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요
만났어도 오늘 또 만나겠고 오늘 또 만나도 내일 또 만나겠고
정말 너무 절박한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구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만나 주세요
성령님 찔러 주세요
항복하고 회개하겠습니다
저의 죄를 책망해 주시고 찔러 주세요
그리고 용서해 주시고
만나 주세요 만나 주세요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으로 가득할 때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혼자 남은 것 같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때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삶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완전하신 하나님께 두는 믿음을 주소서.
더 큰 뜻을 보는 믿음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성도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교인들 사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모든 교인이 하나 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후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성도의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났고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성도가 낙심했고, 몇몇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예일 수 있으나,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 단단히 삐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으로서는 마땅히 구할 것에 대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지만 응답받지 못하고, 마치 버려진 것만 같은 배신감에 괴로워하는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실망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번만큼은 해결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개입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응답도 해 주시지 않은 하나님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자기 생각에 가두다 보니 생기는 결과입니다. **‘실망의 무덤’, ‘두려움의 무덤’**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절망의 자리, 낙망의 자리, 고립의 자리에서 벗어나 주님의 더 큰 뜻을 보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펴 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을 듣고 불신의 방에서 나오십시오.
완벽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 김경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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