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원을 값없이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걱정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험악하고 죄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족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의미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로 인하여 내 구원의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고 조금 더 윤리적인 삶을 살면 구원을 받은 것 같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교회 생활에 게을리 하고 세상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고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교리의 차이 때문입니다. 킬빈주의는 신자가 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자가 구원을 얻었다가 나중에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단순하게 장로교는 칼빈주의, 감리교는 알미니우스주의라고 평가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감리교를 알미니우스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지금의 감리교는 복음적 알미니우스인 웨슬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입니다.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정통신학이라는 것은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정통교회라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중간에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느냐는 문제인 성도의 견인(堅忍)을 알아보기로 합니다.
장로교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설교를 자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대충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을 목사님이 혹 할 수는 있지만 자주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여부는 모른다고 하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리어 내가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는 구절이 있습니다(고전 9:27). 이 구절에 따라 우리들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 경우가 생깁니다. 바울 사도는 겸손하게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못 받으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크게 구분하면 구원은 위치적인 구원과 점진적 구원이 있습니다. 위치적 구원은 어린아이 같은 구원으로 예수를 마음으로 주님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가장 원론적인 구원의 공식입니다.
점진적 구원은 예정, 선택, 부르심, 중생, 양자, 믿음, 연합, 성화, 영화 같은 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장고하고 지난한 세월을 요구합니다. 나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다고 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구원을 받은 신자는 선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게 마련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신자를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른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이 참된 구원인지 아니면 거짓된 구원인지 냉철히 분석하여야 합니다. 아니면 고백한 구원이 거짓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리상 차이가 있습니다. 칼빈주의를 믿는 장로교는 한 번 구원을 받는 신자는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습니다. 감리교는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인 웨슬리주의를 믿으므로 성도가 중간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편이 옳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저는 장로교목사이기에 성도의 견인을 믿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에 주장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혹 오해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성도의 견인(堅忍)이란 성도가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과정 중 성령님이 도와주시어 힘을 주신다고요. 단순히 성도의 견인을 신자가 개차반으로 놀아도 결국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정설을 어떻게 살아도 결국 구원을 얻는 다고 잘못 해석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성화를 무시하면 이단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니까요. 매우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한국교회의 장로교는 칼빈의 5개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지 않으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목사후보생과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칼빈의 5대교리도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목사가 수용하지 못하면 신자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과 예정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잘못하면 세상을 적당히 즐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성도의 견인과 예정설을 잘못 알아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 여기며 생활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마치 어떤 이단과 같은 말을 합니다. 그 이단의 이름을 밝히지 못해도 아시겠지요. 구xx입니다. 요즘 구xx 이단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하고 있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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