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은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가, 아니면 저 멀리 계시는가. 다음 성경 구절을 보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사 57:15)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늘 위에 있는 분이며, 동시에 우리와 가까이 계신 아바 아버지다. 아니, 어떻게 가까이 계시면서 동시에 떨어져 있을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다.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을 받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하나님이 가까이 혹은 멀리 계신다는 말씀은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은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자주 “주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주의 품에 안깁니다”라고 노래한다. 과거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갔던 지성소로 매일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말이다.(히 4:16, 6:19)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으로 초청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고 그의 응답을 받는다.(요 15:7, 17:21)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우리를 매우 잘 알아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신다.(롬 8:26~27)

반면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멀리 있기에 인간의 편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역사를 당신 뜻대로 주관한다. 우리와 너무 멀리 있으므로 우리는 그의 뜻을 파악할 수 없으며 그의 결정에 어떤 도움도 드릴 수 없다.(롬 11:33~36) 그는 높은 보좌에 앉아 왕과 재판관을 재판하는 분이다. 그 거룩하고 높은 분 앞에 더러운 옷 같은 우리의 의를 자랑할 수 없다.

때로 하나님은 마치 악인을 심판하지 않고 의인의 간구를 외면하는 숨어 계신 하나님, 부재(不在)하는 존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사 45:15) 아무리 그를 찾아도 만날 수 없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않는다.(욥 23:8~9) 신실한 성도는 목마른 사슴처럼 그를 찾다가 지치기도 하고, “하나님,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외마디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시 42:1, 22:1)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느끼는 게 반드시 약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친밀성의 증거일 수 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의 연락은 몇 달 만에 받아도 어색하지 않지만 매일 두 시간씩 전화하던 애인이 한 시간째 문자에 답장하지 않으면 초조해 견딜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체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성보다 친밀성을 선호하는 편이다. 왕이나 재판장, 하늘 같은 하나님보다 양들을 돌보는 목자나 따뜻한 남편, 탕자를 맞아주는 아버지나 날개를 펼쳐 병아리를 보호하는 암탉, 깊은 밤 동산에서 함께 거니는 친구 같은 하나님을 좋아한다. 친밀성을 강조하는 신앙에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하다.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 뜻으로 믿어 버린다. 자신의 성취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증거라 여기며 그의 권위를 끌어내려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분이다. 그는 바벨탑 문명과 첨단 과학기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우습게 여기는 분이다. 인간의 모든 주의(主義)를 심판하며, 한국교회를 향해 심판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분이다. 그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

장동민(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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