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구원론

Principle 2024. 6. 12. 18:06

칼빈의 구원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하나님의 절대 주권

창세전 택함.

성경적 진리.

창조가 하나님의

전적 사역이듯

구원도 하나님만의

전적 사역이다.

인간의 협력이나

동의(전적타락으로

구원을 향한

자유의지 상실)가

필요치 않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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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으로 해석하는 것을  금기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 의도가   그대로 드러내기 위하여  전적 헌신하다.

칼빈 신학의 핵심은.

구원론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딤전4:10)"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17:3)"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생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 "

(cf. John Calvin, Inst. I. 헌사   p 21; 4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이 구원 되도록 확정하셨기 때문"

John Calvin, Comm., John 3:17.****

구원론의 핵심은

성령론

오직 "그리스도는 성령으로서만 우리와 결합하신다.

동일한 영의 은혜와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아래에 두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Inst., III. i. 3.

성령론의 핵심은.

예정론

오직 택하심을 받은 성도만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벧전 1:2)

이렇듯 ‘순종함’도 은혜의 선물이다.

( Inst., III. 14장 1-6)

로마서 8장 29-30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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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5절과 11절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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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

핵심은 예정론이 성경적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 속성의 완전하심을

절대 신뢰. 무한 신뢰가

택함받은 자의 특성.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부인(否認).

자기 부정(否定)이

예수 믿는 것.

예수 따르는 것.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

완전한 연합.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하나님 언약.

성경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

그러한 가운데 당하는

많은 고난(십자가)을

인내하고 감내하는 자.

하나님이 택한 자만 가능한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주셔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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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레는 칼빈보다 200여년 후 사람이다.  웨슬레도 처음에는 칼빈주의자였다.  모라비안 교도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자발적 열정을 보면서  영국교회가 칼빈주의 아래서 타락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인간 책임을 강조하는  신학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나와 칼빈의  차이는 머리가락 하나 차이라고 말했다.  즉 그 차이는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중은혜 - 칭의 와 성화

칼빈이 말하는

"신비적 연합"

(unio mystica)으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중은혜,

곧 칭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

기독론 이해에 있어 핵심논점인

"칼케돈 원칙"

(Chalcedonian axiom),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반드시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서로 혼동되거나

분리되어서도 안된다"

(distinctio sed non confusio

et separatio)라는

이 원리에 의하여 "신비적 연합"도

이해되어야 한다.

(요14:10-11)

[요한복음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칼빈은 이러한**

"칼케돈 원칙"을

전체 구원론 논의의

주요한 틀뿐만 아니라

각론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

가장 중요한 해석적 원리

(the hermeneutical principle)의

하나로 고려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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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구원론

구원의 완성

그리스도와 연합

예수님과 하나 됨

요한복음 17:21 - 23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칼빈의 구원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hristo; the

union with Christ)이라는

핵심 사상.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hristo)이라는

중요한 주제는 칼빈 신학에 있어

삼위일체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성례론,

영성론 등 아주 다양한 분야를

상호 긴밀하게 통합하여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개념이 칼빈 신학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중심 교의"

(a central do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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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구원론

그리스도와 연합

오직 성령으로만

칼빈은 세례를

칭의와 성화의

시작이라 고 봄.

세례는

믿음의 시작.

구원의 시작.

성령의 은총의

시작이라 말함.

(칼빈의 세례론 참조)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 가르치신

구원의 이중 구조

첫 째

내가 먼저 예수님 안으로

둘째

예수님이 내 안에

[요한복음 15:4 - 7](http://www.bskorea.or.kr/bible/korbibReadpage.php?back=yes&version=HAN&book=jhn&chap=15&sec=4)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거듭남

물과 성령으로(요3:5)

물세례는 칭의

원죄에서 해방

(롬6;1-10)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자범죄에서 해방

(롬8:1-2)

성령 충만

예수님과 완전한 연합

그 증거

아가페(롬5:5)

마음이 새롭게

하나님 뜻을 행함

(롬12:1-2)

마음이 새롭게

예수님 마음을 가짐

(빌2:5-8)

성령 충만

마음의 변화

타락한 아담의 성품(정욕)에서

예수님 마음으로

재 창조 받음

(갈6:15)

오직 성령으로

예수와 하나됨.

신비적 연합.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충만한] 생명이

감추어져 자신 안에 묻어두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아들 안에

그것을 부어주셨고,

그것은 우리에게로 흘러 넘쳤다."

John Calvin, Comm., John 5:26. Cf.

칼빈의 주석은 Commentaries of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3, Reprinted)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 안으로

숨쉬어진 생명이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질 때

생명이 있으며 그와 함께

동일한 생명을 누린다."

Comm., Eph. 2:4.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없이

생명의 구원이 있을 수 없다.

칼빈은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멀리서 나타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셔서

그의 모든 은혜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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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본질적 증거

예수님과 하나됨.

방언 능력 병고침 등등

은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하나님 뜻대로 각자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은사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함.

반면 모든 은사를 한 사람이

다 받은 사람도 없다고 함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증거는 예수님과

하나되게 하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권능은

죄의 권능보다 크시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화되는 것이다.

(Cf. Calvin, Comm., John 6:12.)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다.

즉, 성령이야말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vinculum)"이시다.**
 Inst., III. i. 1.
****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인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unio mystica cum Christo)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기독론)과

성령의 구원사역(구원론)은 하나로 연결된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덕들을

우리에게 개인적이며 주관적으로

적용하시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구조를 통하여 객관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historia salutis)에

연결되며 통합됨을 의미.

내재적 삼위일체

(the immanent Trinity)에 있어

성령은 이미 성자와 성부의 위격적 연합

(hypostatic union)을 위한

"사랑의 띠"(vinculum charitatis;

the bond of love)이시다.

내재적 삼위일체에 있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 서로 구별된 자존성을 가진

"실재"(subsistetia; subsistence)이시지만,

또한 서로 나누일 수 없도록 상호내주

(perichoresis)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다.

Cf. Inst., I. xiii. 6, 16-20.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서

하나님의 이중은혜

(duplex gratia - 칭의와 성화)를

받으며 나아가

"하나님과의 연합"

**(**the union with God; cf. Inst. III.vi.2; III.xxv.2)
**에 참여.**

그리스도께서는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의

연합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유일한 결합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the only bond of our union with God is,

to be united to Christ)"  Calvin, Comm., John 16:27.

이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서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자됨의

**결합**"(the bond of our adoption)
**이라고**

**한다.** Inst., III.6.3.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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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

(칭의. 성화)없이는

구원이란 불가능한 것.

구원의 범위는

우주적이지만,

적용은 개인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길가밭 마음을 가진자도.

돌밭 마음을 가진자도.

가시떨기 마음을 가진자도

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을 받는 자는

좋은 밭 마음.

성령 충만한 마음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구원)하는 자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 뿐이다.

누가복음8장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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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은

은사 중심이 아니고

(은사주의. 세속주의. 번영 신앙),

구원의 핵심이다(칼빈주의).

성령충만을 왜곡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그러나 특별히

성자에게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the whole fullness) 부어주심으로

그의 풍성한 은혜의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 불리고,

또  "아들의 영"이라 불리운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실 성령의 선물들은

그리스도께서 맡아가지고 계신다. . . .

또한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the eternal Word of God;

[i.e.,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영(the same Spirit)으로

성부에게 연합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중보자(the Mediator;

[i.e., 경륜적 삼위일체 속에서의 성자 하나님])로서의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 . .

**"생명을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i.e., "살려주는 영"],

고전 15:45)이신 . . .

성자께서는 이 독특한 생명을

그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들에게 불어 넣으신다. . . .

따라서 "성령의 교통하심"(고후 13:14)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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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받은 성도에게

성령충만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의 필수적인 도구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은 칭의와 중생 안에서

이 구속이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있어

필수적인 수단이다"라고 했다.

Francois Wendel,

Calvin: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by Philip Maire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7), 239-40.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띠

(the bond of our union with Christ)이시고,

그리스도는 다시 우리를 하나님에게

연합시키는 띠(the bond of our union

with God)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말하는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the communion

of the Triune God)에 참여하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trinitarian soteriology)의

총체적인 본질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칼빈의 구원론을

전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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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다양한 용어로서 설명하고 있다:

"접붙여짐" (engrafting),

"교통"(communion),

"친교"(fellowship),

"한 몸됨 / 영적결혼"(one flesh/spiritual marriage),

"영적 연합"(spiritual union),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함께 자라감 / 하나됨" (growing together/becoming one),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

"그리스도에게 참여함" (partakers of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와 같은 다양한 표현들을 분석함으로서

칼빈이 말하는 "연합"의 본질적인

의미와 이것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구원론의 다양한 측면들,

즉 믿음, 칭의, 성화(중생)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일종의

"신비적인 연합"(unio mystica)이다.

이것은 칼빈이 의미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과 특징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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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지주의적 제의나 밀교적인

황홀경의 체험 혹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적이거나

수사적(figurative)인 표현이 아니다.

신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재적"(real)인 연합.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엡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29)

'접붙임'을 받으며(engrafted into him; 롬 11:17),

'그리스도로 옷입는다'고 하였다(put on Christ; 갈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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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의 실재성을 고전 11:24: "확언컨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심은 그가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며(dwells in us), 우리와 하나가 되심(one with us)으로서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가 될 때(엡 5:30), 즉 우리가 그와 함께 일체가 되어져(incorporated with him) 하나의 생명과 실체(one life and substance)가 될 때이다." Comm., I Cor. 11:24.

연합은 "실재적"(really)인 것으로서, "참으로"(truly)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끓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붙어 계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하여 날마다 더욱더 우리와 한 몸(one body)이 되시며, 드디어 완전히 일체가 되실 때까지 그리하신다." Inst., III. ii. 24.   "연합"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실체"(substantia, 혹은 "본질")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결혼의 유비"(analogy of marriage)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연합만이 . . . 우리로 하여금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되게 하여 저 거룩한 결혼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엡 5:30)." Inst., III. i. 3.

결혼을 통한 연합은 . . .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지는 신비한 결합을 말하는 놀라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몸과 살, 그리고 뼈의 지체들이 되기 때문이다. . . . 마치 하와가 그의 남편의 실체(substance)로부터 이루어졌고, 그럼으로써 그의 일부분이 되어졌던 것처럼, 만일 우리도 참된 그리스도의 지체라면 그의 실체(substance)를 나누며, 이러한 교제를 통하여 그의 몸으로 연합된다. . . . 이와 같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은 그가 우리를 그의 실체(substance)에 참여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의 뼈 중의 뼈요, 그의 살 중의 살이다"(창 2:23). 그것은 그가 우리처럼 인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의 몸의 일부로 만드셔서 그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Comm., Eph. 5: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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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말하는 그러한 "실체"(substance)에 의한 "실재적"인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어떤 "본질의 혼합" 혹은 "존재론적 혼합"(a mixture of essence)을 말함이 결코 아니다.  칼빈이 하나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으로서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함에 있어 바로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 연합(unio hypostatica; hypostatic union)을 설명할 때 사용된 "칼케돈 원칙"(Chalcedonian axiom) - 반드시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혼합되지도 않고 또한 나누어지지 않는다"(distinctio sed non confusio et separatio) - 이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이 하나의 "신비적 연합"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 또한 유비적으로 분명히 실제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으로서 그리스도와 신자들(i.e., 교회)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도록 참으로 하나가 되지만 또한 서로 혼합되지 않으며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으로 참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하나가 되지만 서로 혼합되지 않고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머리와 지체들의 결합"이며(Inst. III.xi.10),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 곧 몸이다(cf. 엡 4:15-16; 4:23, 30; Inst. III.xi.5).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은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영적인 연합"(spiritual union)이다. 참으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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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생수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7:37 - 39

37  명절(초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한복음 4:13 - 15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n with Christ)를 . . .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

(the secret energy of the Spirit)를 검토하는 것이

사리에 닿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 . .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는 성령이다

(the Holy Sprit is the bond by which

Christ effectually unites us to himself).

Inst., III. i. 1.

오직 "그리스도는 성령으로서만 우리와 결합하신다.

동일한 영의 은혜와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아래에 두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Inst., III. i. 3.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덕들을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사역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으로 이해함으로써 성령의 주권적인

권위를 회복시킨 것은 칼빈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공헌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B.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칼빈을 위대한 "성령의 신학자"

(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라고 불렀고,

그로 말미암아 전체 교회사를 통해 처음으로

성령론이 제 위치를 찾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Idem,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6), 487.

뿐만 아니라, 워필드에 의하면,

"어거스틴으로부터 죄와 은총의 교리,

안셀무스로부터 만족설,

그리고 마틴 루터로부터 이신칭의 교리가 온 것처럼,

성령의 사역에 관한 교리는

칼빈에 의해 주어진 교회에 대한 선물이라고 말해야 한다.

구원의 전체적인 경험을 특별히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자세하게 상술한 사람이 바로 칼빈이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그러나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함에 있어 우리의 "믿음"(faith)을 통한 연합을 강조한다. 즉, 칼빈에 따르면, "성령이 하시는 가장 주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한다. . . .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다".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 하신다". "믿음은 특히 성령의 특별한 사역인바 그 믿음을 성령에게서 분리시키려는 것은 성령을 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과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며, 이 믿음을 통하여(도구로 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신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믿음과 그리스도와 연합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값없이 주신 약속에 도달하기까지는 믿음이 견고하게 설 수 없다. 둘째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전혀 화해시키지 못한다. . . .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

이러한 이해를 중심으로 우리는 칼빈의 구원론의 전체적인 논의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 성령 --> 믿음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이중은혜 (칭의 / 성화) ]

(Spiritus Sanctus) (Fide) (Unio cum Christo) (Duplex Gratia)

이와 같이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오직 우리의 믿음을 도구로 하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이 이루어짐으로서 그리스도의 온갖 좋은 구원의 유익들이 우리에게 주어짐을 알 수 있다. 즉, 칼빈에 의하면 우리에게 있어 성화와 칭의는 모두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동시적으로(simul) 얻게 되는 이중은혜인 것이다: "회개[=중생, 성화]와 죄의 용서[=칭의]는 - 곧 새로운 삶과 거저 얻는 화해는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음을 통하여 얻는다."

이러한 모든 논의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조명하심으로서 믿음을 가지게 하실 때, 동시적으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시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 그러한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축복, 곧 "이중은혜"(duplex gratia)

그리스도와 연합의 열매들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죄사함)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부활)을

받았느니라” (골 2:1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딤후 1:1)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고전 15:58)

“주 안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것(엡 6:1)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5-26).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할 것"(골 3:18)

"경건하게 살며"(딤후 3:12),

"선행을 하고"(벧전 3:16),

그 모든 것이

오직 “주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

칼빈의 구원론의 본질:

"이중은혜"(Duplex Gratia)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 결과로서 "이중은혜"

(duplex gratia),

곧 칭의(iustificatio)와

성화(sanctificatio)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칼빈의 구원론

중심이라고 한다면,

그 결과로써 주어지는

이중은혜(duplex gratia)

칭의와 성화 - 는

칼빈의 구원론의

본질적인 내용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unio mystica cum Christo)에

기초한 이중은혜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 따라 칼빈에게 있어

칭의와 성화는 서로

동시적(simul)이며

불가분리적인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단지 칭의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붙잡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를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목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Comm., Rom 8:13.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죄의 용서와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지셨을 뿐만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서

(고전 1:30 참조),

그리고 생명수의 원천으로서

(요 7:38; 4:14 참조) 보내지셨으므로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화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Inst., III. ii. 8.

이와 같이 칼빈이 칭의와 성화를

"반드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지만

서로 혼동하거나 분리될 수 없는"

(distinctio sed non confusio

et separatio),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동시적"(simul)으로

누리게 되는 서로 구별된 하나님의

은혜의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한 것은

신학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해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이중의 은혜로

파악함으로서 칼빈은 종교개혁의

구원론 논쟁을 성경적으로 올바로

교정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칼빈이 말하는

이중은혜의 정확한 개념과

그것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이중은혜(Duplex Gratia)의 개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도구로 하여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unio mystica cum Christo)을 이루고,

그 결과로써 칭의(iustificatio)와

성화(sanctificatio)의

이중의 은혜(duplicem gratiam;

a double grace)를 입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이중의 은혜

(duplicem gratiam)를 받는다.

첫째는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대신

은혜로운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Inst., III. xi. 1.

이와 같이 칼빈에 의하면

칭의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화도 오직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성령의 주권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중은혜(duplex gratia),

곧 칭의와 성화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연합을 말함에 있어

일종의 "이중연합"(the twofold

communion with Christ)에

대하여 말하는데,

물론 이것은 각각 정확하게

칭의와 성화의 이중은혜

(the twofold grace)에

상응하는 것이다.

먼저 그는 갈 2:20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안에서

두 가지 방법(two ways)으로 사신다.

하나는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다스리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를 그의 의에 참여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그에게 받아들여지게 하시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중생(regeneration)에 관계되고,

두 번째는

거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justification)에

관계되는 것이다. "

Comm., Gal. 2:20.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중연합의 개념을

칼빈이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hn Calvin, Letter 2266 to Peter

Martyr Vermigli, 8 August 1555,

C.O. 15:723.

여기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첫 번째 연합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며,

두 번째 연합은

"첫 번째의 열매와 효과"인데,

그리스도께서 영적 은사들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것이다.

탐부렐로(Tamburello)의

분석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첫 번째의 것은

"전체적"(total)인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두 번째의 것은

"부분적"(partial)이며

"성장하는 것"(grows)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

칭의는 항상 "전체적"이지만

성화는 항상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아주 정확하게

상응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우리의 참여는

"전체적"(total)인 반면에,

중생(성화)의 연합은

"부분적"(partial)이고

"점진적"(progressive)인 것이다.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87.

그러나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칼빈이 말하는 이러한

"이중연합"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합에 불가결하게

두 가지 측면, 곧 "이중은혜"

(duplex gratia)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중은혜는 칭의와 성화이며,

그것은 서로 구별되지만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칭의와 성화의 관계

"칼케돈 원칙"

(Chalcedonian Axiom)

Distinctio sed non

Confusio et Separatio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는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가?

로마 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 혼동함으로서

인간의 믿음과 함께

선행의 공로에 근거한

칭의를 주장하였고,

또한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킴으로서

칭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반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 두 가지 오류들을

성경적으로 교정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그의 대안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에 근거한

"이중은혜"(duplex gratia)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혼동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cf. Inst. III.xi.1, 6).

칼빈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

(롬 6:4 참조)는 매우 다를 것이다."

Inst., III. xi. 11.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적(inseparable)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성화 없는 칭의는

있을 수가 없고

그 역 또한 사실이다.

분명한 사실은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칭]의는 서로 다르다"

(the benefits of Christ

sanctification and

righteousness - are

different)는 것이며,

Inst., III. xi. 14.

또한 동시에

"실제적인 거룩한 생활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의 전가로 부터 분리될 수 없다"

(nevertheless actual holiness

of life is not separated from

free imputation of

righteousness)는 것이다.

Inst., III. iii. 1.

이와 같이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결코 서로 분리(separatio)

될 수 없는 끈

(i.e.,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결합된 것이 때문에

만일 이것을 분리시키면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조각 찢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칭의와 성화는

서로 혼동(confusio)될 수도 없으며,

반드시 구별(distinctio)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이중은혜(duplex gratia)인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칼빈이 소위 "칼케돈 원칙"

(Chalcedonian axiom) -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혼동되지도 않고 또한

나누어지지 않는다"

(distinctio sed non

confusio et separatio) - 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적인 관계에

대하여 칼빈은

고전 1:30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i.e., justification)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용서함을 받았으며,

그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의롭게 되었다.

믿음의 [칭]의는

죄의 용서와 은혜의

용납하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본성적으로

불의한 우리가 그의 영으로

거듭나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우리는 동시에(simul)

거룩한 삶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혜의 선물은

서로 나눌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그것을 나누려 한다면

조각조각 찢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동시에(simul)

성화를 위해 그를 붙들지 않으면,

곧 삶의 거룩함과 순전함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이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믿음으로 값없이

칭의를 얻는다는

설교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람들에게 선행을

중지시킨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이 구절은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와 함께

똑같이 중생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논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사역은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을

혼동하는 잘못은

허용될 수 없다.

Comm., I Cor. 2:30 (강조 첨가).

칭의와 성화의 "동시성"

(Simultaneity)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어떤 시간적인

연대기적 순서나,

인과적인 관계,

혹은 목적론적인

관계에 있지 아니하다.

회개(悔改)

하나님께로

삶을 전향하는 것.

영혼 자체의 변화.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

육을 죽이고

영으로 사는 것.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

칼빈은

회개.

중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회개가 중생.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토록 하는 것.

칼빈의 회개는

성화론에 일치.

회개는 믿음의 결과.

믿음이 있어야 회개함.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비가

회개의 원인.

회개가 근거가 되어서

죄를 용서받을 자격 주심.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회개를 믿음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또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 방향 전환.

세상. 돈. 자기 정욕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말씀. 성경)

대로 사는 것.

즉 천국과 영생을 위해

전심전력하는 삶을 사는 것.

천국과 영생

하나님의 언약.

천국과 영생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회개할 믿음을 주심.

회개는 중생(거듭남).

칭의. 성화시작. 구원.

죄사함. 믿음의

동시적 사건(행2:38).

그리고 합당한 회개를

하나님이 보증해 주시려고

성령충만을 주시고

아가페를 그 성도 마음에

주신다(롬5:1-5).

아가페는 성화의 표가

된다(고전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아가페)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아가페)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아가페)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천국과 영생이 아니라면

회개할 필요도 없음.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없음.

천국과 영생보다

세속적 성공.

축복을 바라는 이들이

회개한 하나님의 자녀일까?

칭의 다음에

축복 성공 정욕 추구라면

바른 설교일까?

종교 개혁이 일어난

싯점의 타락상과

비교해 볼 이유가 있다.

칭의(稱義)

칭의(稱義) 또는 의인(義認)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은 의를

전가하신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의의 중보로

우리는 칭의를 얻는다.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자손이 아닌

유일한 사람.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그 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하시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받는

대속의 은총.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납이며 죄의 용서.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

(고후 5:18-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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