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딤전1:5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2
(고전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60:19, 렘31:34, 합2:14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2)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걸까요?
이 질문은 간단한 질문이지만 가장 심오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도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우리가 사랑스럽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불순종와 반항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7:9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우리의 내적 존재는 죄로 인해 너무나도 타락해 있어서 스스로가 얼마나 죄로 물들어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3:10-12에는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피조물을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8과 16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선언은 없습니다. 이것은 심오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하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하나님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다른 성품들, 심지어 분노와 화에도 사랑이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속성을 보여주시는데, 사랑 또한 그분의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크고, 높으며,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이며, 모든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우리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가페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심과 (요일 4:10),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심 (요 6:44),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역을 용서하심 (엡 1:3–10),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요 14:16–17)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 13:34–35).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아시고 인격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헬라어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랑”이라고 번역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다른 사랑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아가페적 사랑의 핵심은 선의, 박애,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향한 의지적인 즐거움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가페는 로맨틱하고 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헬라어로 “필리아”라 하는 진한 우정이나 형제애를 말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실함, 헌신 및 의지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고귀한 도덕적 성격과 강한 특성으로 인해 다른 사랑과 구별됩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 밖에서 아가페라는 단어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그 자체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8). 하나님은 단순히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사랑으로 부터 흘러나옵니다. 아가페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합니다(누가복음 10:27). 즉, 주인에 대한 종의 신실한 섬김(마태복음 6:24)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애착(요한복음 3:19)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랑의 종류는 우리에게 자주 들리는 것처럼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그분의 본성이고 그분은 본성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항상 행위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우리는 그런 희생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로마서 5:8).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가 자격이 없어도 베푸시는 것이며, 자비로우며, 끝없이 그 분께서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3:1).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결국 그분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겁니다(요한복음 3:16-18).
우리 역시 상대가 믿는 자든(요한복음 13:34), 원수이든 간에(마태복음 5:44) 서로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를 예로 드셨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느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남의 필요를 위해 의지적으로 기쁘게 결심하여 하는 행동임을 그리스도께서 본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듯 우리가 사랑하려 한다면, 그 사랑은 오직 그 원천으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로마서 5:5; 갈라디아서 5:22).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기애,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하나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경적 사랑은 이타적이고 무조건적인데 반해,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면 사랑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할 수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해본 자 만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로마서 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일서 4:16-1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겁니다.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자기애는 차고 넘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한마디로 우리 자신을 우리가 대하듯 남들도 똑같이 대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절대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이미 사랑한다는 전제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갱생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진정으로 이웃된 자는 사마리아인 딱 한 명 뿐이었습니다(누가복음 10:30-37). 사마리아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움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진정한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자원, 돈을 남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안이 아니라 밖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화를 통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누가복음 10:25-29).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눈을 떼고 다른 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성숙하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3-4). 이 구절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하려면 겸손해야하고, 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놓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이기적이고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준에 못미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우리 스스로가 매우 귀하다고 가르칩니다(누가복음 12:7). 균형잡힌 성경적인 관점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고유의 피조물이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 즉 “우리의 이웃”에게 그 사랑을 나눕니다.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밖을 향해 사랑할 수 있게 되려면 우리의 “자아”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왜 그리 어려운 것입니까?
때로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사랑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흔한 표현은 “많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곤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자기 자신의 죄, 혹은 우리가 사랑하려 하는 사람들의 죄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세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타인의 유익을 구합니다(고린도전서 13:5; 빌립보서 2:3).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죄된 경향과 맞서 싸우며, 타인의 이기심과 죄된 경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사랑을 어려운 일로 만들곤 합니다.
타인을 사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종종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주로 감정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관점의 문제는 우리가 항상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인해 나오는 행동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감정 자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인에게 행하라 하신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며,
이 사랑의 핵심은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희생을 요구했기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타인을 위해 희생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합니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악의 상태이자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전혀 사랑 받을 구석이 없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8; 요한복음 15:13).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희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의 깊이를 얼핏 알 수 있으며, 그럼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어 보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예수님이 **“서로를 향한 사랑을 느껴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을 명하셨습니다.
타인을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려 하여 사랑이 없는 스스로를 채찍질해 사랑을 느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위선을 유발하며, 마음은 차가운데도 사람을 사랑하는 척 **“연기”**하게 만들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며(요한복음 15)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라야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22-23).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며, 서로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을 배웁니다(요한일서 4:7-12).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께 스스로를 내주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셔서 당신의 영광이 더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거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도 사랑하기로 선택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보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타인도 사람이고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영이 빛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다른 이들도 높임을 받고, 세상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일까요, 무조건적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묘사된 것과 같이 그 사랑을 받는 백성들의 자질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들을 향해)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무조건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요 4:8). 또 그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복음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시는 데, 그 결정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입니다 (엡 1:4-5).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6-8).
로마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이와 같이 불의한 자들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롬 1:18-20).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의 노예가 됩니다. 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롬 3:23)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의 눈에 의를 행하는 자도 없습니다 (롬 3:10-18).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런 적대감과 적의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달래는)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속죄할 수 있을 상태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이 되어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도록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요 1:14).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성, 즉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경험하셨고, 그 후에 우리 죄를 대속하도록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다음에 나오는 두 구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4-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사랑에 반응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무조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이라면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메시지, 즉 복음은 사랑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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