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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자유의지를 주어 타락케 했나요?
[질문]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제일 궁금했던 점은 “하나님은 애초에 왜 인간을 당신을 거역할 수 없는 즉, 선악과를 따먹지 않음으로써 타락으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설명을 들어도 명쾌해지지 않습니다.
[답변]
“저 총각의 부인은 미인입니까?”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질문으로써 일고의 가치도 없고 답변할 필요도 없습니다. ‘총각’이라는 단어 자체는 결혼하지 않아 부인이 없다는 뜻인데 부인에 대해 물었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고 답변할 수 있는 범주와 한계 밖의 논의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의문들도 잘 따져보면 사실상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함유하는 의미와 성경적 정의가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뜻은 “인간을 포함한 이 땅에 존재하는 만물을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만드시고 지금도 그에 따라 세상만사를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본 주제와 연결해서 설명하자면 처음부터 인간을 선악과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안 따 먹을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드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또 그렇게 하신 것에 악, 허물, 오류, 착오라곤 단 한치도 개입되지 않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발전된 정의로서 성경이 계시해 놓은 바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정의에 반(反)하는 질문은 질문으로서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을까?” 같은 것입니다. 지금 질문하신 내용도 정확히 또 엄밀히 따지자면 그와 같은 부류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불신자는 괜찮지만 성경을 아는 신자로선 끄집어내선 안 되는 질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이런 꼴입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왜 나를 이렇게 키 적고 못 생기게 낳으셨어요? 이왕이면 키 크고 잘 생기게 낳아주셨어야지요?”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묻는 불효자 아니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철모르고 어렸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누구나 들지만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자 불만임을 알기에 금방 포기하고 이미 그렇게 태어난 가운데서 자기 성장을 스스로 도모합니다.
완전하지 않는 비유라고 전제한 뜻을 아셔야 합니다. 인간 부모는 자식을 자기가 설계해서 낳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당신만의 설계도에 따라 인간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이미 태어난 이후의 상태에 대해 불만은물론 의심도 할 수 없는데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에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물론 처음 예수를 믿어 창세기를 배우게 되면 누구나 궁금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 줄 알면 부모에게 그런 의심과 불만이 없어지듯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면 더 이상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이 비유는 그래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태도에만 적용됩니다.
신앙이란 또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자기인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뜻을 안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인간은 토기인데 토기장이가 귀하게 쓰이는 토기든 천하게 쓰이는 토기든 마음대로 만들 권한이 있다고 변증한 대로입니다. 구원을 주려고 택하는 예정에 대한 변증이지만 인간을 당신의 뜻대로 종류별로 만들 수 있는 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근본적인 본성은 더더욱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신앙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창조한 이후의 상황과 사건에만 신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모든 학문 사상 철학도 인간으로써 실존하게 된 이후에 이 땅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모든 자연과 상황에 맞추어서 고안 발전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과학도 하나님이 이미 창조(발명)해 놓은 것 안에 운행되는 원리를 역으로 추적(발견)한 것일 뿐이듯이 신앙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기존에 실존하지 않는 것들과 일어날 수 없는 일들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오직 당신께 순종하게만 하는 방식으로 만들지 않았느냐는 불만은 도무지 발생할 수 없는 일을, 심지어 하나님이 되어야만 해결되는 의문을 갖는 셈입니다. 창조 이전으로 돌려야 하지 않느냐는 반발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 혹은 불순종할 수 있게끔 만들었으니까 자유의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지는커녕 의지도 아닙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자 바로 그것이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인간이 인간 밖의 일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인간이 해선 안 되는 일입니다.
다시 부모와 자식의 비유로 돌아갑시다. 이미 키 적고 못 생긴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 즉,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선 따질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불효는 될지언정 성립되지 않는 불만은 아닙니다. 키 적으니 체육관에 가서 키 크는 운동도 하고 그런 영양제도 사먹어야 하니 용돈을 더 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왕에 못나게 태어났지만 몇 군데 성형수술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사정도 모르는 철없는 짓일 수는 있어도 전혀 틀렸거나 말이 안 되는 요구는 아닙니다. 신자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고 응답은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듯이 말입니다.
또 다른 집 부모는 자식이 말만 하면 다 들어주던데 우리 집은 그 집보다 못 사는 것 같지 않는데도 왜 친구 부모처럼 하지 않는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는지 불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종교는 잘 믿으면 만사 형통한다고 가르치는데 기독교는 거룩하게 살라고만 하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모를 때는 비슷한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는 부모는 자식을 망칠 뿐이며 오히려 힘에 겨운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공부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참 사랑임을 조금만 이성이 깨여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준 모습과 처해진 상황 아래에서 그분의 더 깊은 뜻을 알아서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한마디로 사탄의 꾐에도 넘어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뜻을 헤아려서 그에 걸맞게 반응해야만 참 신앙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흑암의 세력에 당당히 대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왜 사탄의 방해를 방치하느냐 따지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헛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본 질문에 가장 보편적인 답변은, 가장 보편적이라는 표현은 핵심적이고 본질적 진리라는 뜻을 이미 함의하고 있음, 인간을 물질이나 기계나 동물로 만들지 않고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을 찾고 순종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려는 뜻입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알기 쉽게 말하면 “두 발로 서는 동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 외에 더 심오하고 은혜로운 변증은 사실상 필요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까지 연결하는 것은 믿음이 성숙된 신자에게 행하는 신학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5-9)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천사보도 못하고 동물보다 뛰어난 존재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이 땅의 물질계 안에서 하나님 대신에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영계에서 활동하는 천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하니까 물질은 물론 식물이나 동물과도 같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자연법칙과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들을 다스리려면 그 둘에 묶이지 않는 자유의지가 필수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영도 있어야 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완벽하게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그 창조된 본연의 상태로도 에덴동산을 아름답게 잘 가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전혀 부족함 없이 참 기쁨과 만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천사처럼 그 존재하는 형체도 달라서 눈에 보이지 않게 영계에서 활동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기를 따르는 선한 천사들과 거역하는 사탄과 졸개들이 생기도록 만드셨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보도 조금 못한 인간도 당연히 그렇게 만들었어야 하고 이미 사탄이 존재하는 이상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모든 피조물과 다르게 두 발로 서는 동물로 만드셨습니다.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서야 합니다. 육신적 생명은 물질계의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으며 육신적 생명의 나고 죽음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달렸습니다. 반면에 다른 동물과 달리 두 손은 하늘로 펼쳐들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을 따로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자 이 땅의 청지기로서 이 땅의 유일하고도 참 주인인 하나님께 두 손을 벌려 기도하면서 교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계시 받아 그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고 또 그런 고귀한 신분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두 손 벌려 감사 경배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어도 하나님 말씀에 정진하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구체적인 구원 진리를 몰랐어도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은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자유의지를 주신 의미대로 순종했듯이 다윗도 자유의지를 갖도록 만들어진 인간의 정체성을 정확이 깨달은 것입니다.
다시 비유하자면
키 적고 못나게 (악에게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게) 태어났어도,
오히려 그런 것이 성장하고 온전해지는데(인간 창조의 경륜을 깨닫고 참 인간답게 사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부모에게 감사한(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체성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이 구약시대에 그것도 다윗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하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의심은 하지 않았으나 그 원인이라도 알고자 몸부림쳤습니다.
본 질문의 뜻은 왜 자유의지를 주어서 결과적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그 후손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욥도 비슷한 맥락으로 내 쪽에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는지 이유만이라도 알고자 따졌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은 백 개가량의 물질계의 원리에 대한 질문을 욥에게 답해보라고 던집니다. 욥이 알 수 있는 질문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물질계에 일어나는 일도 즉, 창조된 이후의 현상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영계에서 사탄과 내기한 사정을 네가 알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뜻입니다. 결국 욥은 아래와 같은 고백을 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겸손하게 항복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1-3)
욥으로선 물질계를 다스려야 하는 인간인데도 자연에 일어나는 어떤 상황도 그 이유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경륜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아름답게 생육 번성시킬 소명에 충성 순종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이후의 일도 그분의 잘못 허물 책임을 따질 수는 당연히 없고 이유마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잘 인내하고 나중에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무조건 선하므로 그분만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식도 인간 부모가 행하는 일이, 이미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성된 후에, 마음에 안 들 수 있고 이해되지 않을 때 많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그런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 부모 본인이 잘 되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세상 모든 인간은, 신자라면 더더욱 이미 자유의지를 갖도록 창조된 이후이므로 욥은 말도 안 되는 고난에도 그랬는데, 그렇게 된 바탕 위에서 그분께 순종 감사 경배 찬양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천사보다 못하지만 이 땅의 만물을 다스리는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아무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차고도 넘치도록 만들어주셨기에 오직 찬양밖에 그분에게 돌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인간 식의 생각에 묶여있다는. 말하자면 원죄의 본성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서 더욱 순종하겠다는 순전한 의도보다는 그렇게 만든데 대한 조금의 불만이나 원망이 내포된 질문이라면 말입니다.
11/1/2018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기쁨의 교제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을 시키거나,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군주 노릇을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관계란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끌어다 사랑하게 만들거나, 사랑하도록 기계적으로 입력시켜 버린다면 사랑의 자발성은 없어지고,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철저하게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떤 결정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악과도 주지 말고, 타락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말고,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게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도 있고 거절 할 수도 있는 자유 의지까지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존귀한 자로 대해 주신 증거입니다. 선악과는 우리를 시험 들게 하려고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말씀을 배반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선악과 사건을 통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했고, 그 저주는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지금도 강제로 빼앗거나 꺾지 않으십니다. 뱀이 유혹하는 그 순간도, 끔찍한 죄의 결과까지 다 아셨지만, 강제로 개입하셔서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특징인 자유 의지를 빼앗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겸손한 사랑의 표현이십니다. 놀라운 것은 범죄 한 후에도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이 일을 감당하시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줄지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결정을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 마음 안에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결정이 있었기에 십자가 복음이가능했고,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복음기도신문]
하나님은 사람에게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리라는 것도 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범할 수 없도록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그 자유의지는 무엇이며, 자유의지는 어떻게 해서 죄의 원인이 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 자유의지의 개념
- 자유의지를 단순히 용어를 풀어 말한다면, 자유롭게 활동하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윤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자유의지를 보통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하나님과 관계되는 종교적, 윤리적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 자유의지를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
-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나 악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의지가 임의대로 어떤 것을 바라거나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먹거나,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의 자유의지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자유의지가 방해를 받게 되면 강한 반발을 하기도 한다.
-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윤리적 의미, 즉 죄의 유무와 상관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소유를 하고 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은 물론이고,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도 이러한 의미의 자유의지에 따라 여전히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지낸다.
-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
-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나 악을 임의대로 바라거나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의미한다.
- 하나님과 사람의 선악 판단에는 서로 차이가 있을 경우가 많이 있다.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가인, 제사장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린 사울 왕, 제사장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등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선으로 인정되는 것을 하나님께는 악으로 판단하시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사회와 가정에 불화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음을 예상하면서도 전도하는 일,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일 등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악하거나 하찮게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인정하시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러한 견해 차이는 죄에서부터 비롯된다. 죄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켜, 하나님과의 차이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오직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에게만 한정하여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이나 악을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범한 이후부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바라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죄는 그 삯으로 사람을 죽게 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빠지게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지 활동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다 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롬 14:23) 그러므로 범죄한 이후의 아담은 자유의지 대신에 오로지 죄를 향해 끌려 다니는 노예의 의지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아담의 노예의지는 그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본질상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고 말하게 된다.(엡 2:3)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말씀했다.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죄인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중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중생한 사람은 범죄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불순종한 결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중생한 사람도 때로는 실족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사람에게는 또다시 정죄함이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롬 8:1)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부터 진정 자유한 사람이다.(롬 5:21)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중생의 결과는 자유의지의 회복이 아니라, 자유의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에게까지도 함부로 사용하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하나님은 오직 선만을 바라고 계실 뿐, 악과 관련된 의지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 자유의지를 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은 사람을 만드시고자 하셨을 때의 창조목적에 적합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부족함이 있어서 반드시 사람을 창조해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기쁘신 뜻이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었다.(사 43: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가장 적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가지게 하셨다. 기계적인 활동의 결과보다 자유의지에 따른 활동의 결과가 훨씬 더 바람직하고도 우월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참으로 선하고 또 적절한 배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이것으로 하나님을 부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에는 주시지 않은 자유의지를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사람을 크게 배려하셨고, 사람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시려 하셨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주신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과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 자유의지의 남용과 그 책임
사람은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다.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하지를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빗나감, 이것이 바로 죄이다. 그러므로 죄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남용한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유의지의 남용은 그 책임으로 죽음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자유의지의 상실도 포함된다. 죄인이 자유의지를 상실했다고 해서, 죄인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상실한 죄인이라고 해서 돌이나 나무가 된 것이 아니다. 죄인도 여전히 상대적 의미의 자유이기는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도 효과적으로 사용을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한 중생의 은혜를 주사 성결케 하실 때에나 주를 위한 헌신을 이루실 때,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억지로 하시지 않고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여서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이 사실과 관련하여,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말씀하는가 하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상실했다고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빌 2:12)이다.
선을 향한 우리의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한 우리까지도 버리지 않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의지를 가질 때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이 바로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최대의 선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한 결과 그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생각하는 것이나 선택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죄로 얼룩져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절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상실했어도 상대적 의미의 자유의지는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지를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또 은혜를 통해 새롭게 하셔서 그 안에다 선의 씨앗을 심어 착한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향한 의지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것으로 알아, 항상 자랑보다는 더욱 겸손과 감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회와신앙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 그 형상에는 선택하는 능력도 포함.
- 본성에 의해 자유의지는 제한됩니다.
- 우리의 본성은 악합니다.
-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할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 즉 우리의 선택은 죄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아서 선한 것을 택할 수 없습니다.
- 자유 의지가 구원을 택할 수 있을 만큼 진정으로 자유 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참으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자유의지"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들의 운명에 진정으로 영향을 끼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 된 현재 상태는 아담과 하와의 선택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형상에는 선택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사람이 무엇이든 그가 기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에 국한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어떤 다리를 건너거나 건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다리 위로 날아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의 본성 때문에 그는 날지 못합니다. 비슷하게, 사람은 스스로를 의롭게 하도록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죄된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로마서 3:23). 이처럼 자유 의지는 본성에 의해 제한됩니다.
하지만, 이 제한이 우리의 책임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나라 (이스라엘)를 택하셨지만 그 나라의 각 개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이외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즉, 룻과 라합처럼).
신약 성경에서 죄인들은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명령합니다 (마태복음 3:2, 4:17; 사도행전 3:19; 요한일서 3:23). 회개에 대한 부름은 선택하라는 부름입니다. 믿으라는 명령은 듣는 자가 명령에 복종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몇몇 불신자들을 향해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40)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올 수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의 문제는 오지 않는 것을 택하는데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 그러므로 구원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0-21).
그러나, 인간이 죄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으면서 어떻게 선한 것을 택할 수 있습니까? 자유 의지가 구원을 택할 수 있을만큼 진정으로 “자유”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5:16).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에베소서 4:23) 새로운 본성을 그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 그 사람의 의지 안에서와 그 의지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동기, 욕구 및 행동은 자발적이며, 우리는 그러한 자발적인 것들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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