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ciple

태초 이전 부터 영원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

잉비니 2025. 3. 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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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내하심에 대한 신학적 연구

1. 하나님의 인내의 본질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인내

성경은 하나님을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며(출 34:6 등), 인내하심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인내란 하나님께서 분노를 늦추시고 오래 참으시는 성품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신적 본성에 속한 특징으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거룩과 정의를 갖추셨지만 동시에 자비와 사랑에 근거하여 죄인들에게 곧바로 진노를 쏟지 않으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긍휼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성경에서 종종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라는 표현과 함께 나타납니다(시 103:8; 욘 4:2 등). 인내는 하나님의 극률과 함께 나타나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된 창조 속의 인내

하나님의 인내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지만 그 근원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성품과 뜻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전지하시기에 인간의 타락과 구원까지 모두 내다보셨고, 창세 전에 이미 구속을 위한 은혜의 계획(plan of grace)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내는 우연히 생긴 즉흥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주권적 경륜에 뿌리내린 속성입니다. 초기 교회의 어거스티누스(Augustine)는 “하나님께 어떤 악으로 인한 고통이 있어서 인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 회개하도록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인내가 있다고 말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본래 고통이나 변화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니지만,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 속에서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인내는 그분의 거룩함과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비롭게 죄인들을 대하시는 사랑의 표현이며, 태초부터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적 근거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내

구약 성경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여러 방식으로 증언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도 즉각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긴 생애와 구원의 약속(창 3:15)을 주셨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하나님은 심판 전에 120년이라는 긴猶여의 기간을 주셨고(창 6:3 참고), 결국 방주를 통한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거듭 불순종하고 반역할 때에도 하나님은 진노를 더디하시어 반복해서 용서하셨습니다. 시내산의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의 중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셨고(출 32–34장), 광야 40년 동안 그들의 “목이 곧은” 반역에도 오래 참으셨습니다 (시 95:10). 이처럼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근심하게 했지만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그들을 인내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타락할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며 즉각적인 멸망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거역한 세대는 결국 하나님의 때에 가서 심판을 받았지만(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이러한 역사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오래 참으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 밖의 이방 민족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4:16은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을 자기 길로 내버려 두셨다”고 말하고, 바울은 아테네에서 하나님께서 **“무지의 때를 눈감아 주셨다”**고 선포합니다(행 17:30) 이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 대하여도 즉각적인 진노를 유예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요나서에서도 하나님은 니네veh와 같은 이방 도시의 죄악 앞에서 조차 회개할 시간을 주시며 멸망을 늦추셨고(욘 3:4, 10), 에스겔 33:11에서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처럼 이방인이라도 돌이켜 살기를 바라시는 긍휼의 인내를 나타내셨습니다.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인내

신약에 오면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더욱 분명하고 풍성하게 계시됩니다. 베드로후서 3:9에서 사도는 **“주께서는 어떤 이들의 더딤과 같이 약속을 더디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향하여 오래 참고 계시니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 얻도록 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의 재림이 왜 이렇게 더딘가?” 질문할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의 것과 다르며(벧후 3:8),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할 시간을 주시려고 인내하고 계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핵심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셨으며(눅 15장 등), 제자들의 부족함과 실수에도 끝까지 참고 사랑하셨습니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며 때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나(요 2:4 등),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며 회개를 호소하시는 장면(마 23:37-38)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예수 안에서 나타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오래 참으심”**을 베푸신 증거가 바로 자신이라 말합니다(딤전 1:16). 즉 바울 같은 자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당장 멸망시키기보다 먼저 희생적인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나아가 신약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지연시키심으로써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마 24:14), 장차 구원받을 자들이 다 주께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리십니다. 베드로는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여기지 말라”**고 권면하며, “주의 날”(재림의 날)이 더디 오는 것 같아도 실상은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 것”**임을 밝힙니다(벧후 3:9). 그리고 이어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곧 구원”**이라고 선언하는데요(벧후 3:15), 지금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기간 자체가 구원의 역사와 직결됨을 뜻합니다. 결국 정해진 때가 차면 “주의 날이 도둑같이” 임하여 하나님의 인내 기간은 끝나겠지만(벧후 3:10),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인내는 최대한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은혜의 시간이라고 신약은 가르칩니다.

3. 교회사 및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어거스틴, 칼빈, 바르트의 이해

초기 교회의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의 인내를 인간의 회개를 위한 신적 관용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성(impassibility)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이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모습을 가리켜 **“하나님께 인내가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어떤 악에 의해 고통당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기다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인내하신다”는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이 같은 참으심을 높이 평가하여, 외경인 집회서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이가 오래 참으시는 보응자”**로 언급된다고 주석했습니다(집회서 5:4).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인내를 인간적인 감정 차원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의지적인 긍휼로 이해하는 교부 시대의 통찰을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의 표현으로 강조했습니다. 칼빈은 베드로후서 3:9를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며 잃어버린 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구원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이 구절의 의미를 오해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미실지라도 그 중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만 효과적으로 이끌어 회개하게 하신다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인내와 구원 초청은 인류 모두에게 주어져 있지만, 최종적으로 그 인내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칼빈은 주님이 재림을 지연하시는 것도 사실은 모든 택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사랑의 섭리라고 보았습니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인내를 일반 은혜(common grace)와 특별 은혜(saving grace)의 두 측면에서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길을 열어주시지만, 그 인내의 궁극적 목적은 택자들의 구원을 완성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속성 중 하나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본질에 깊이 뿌리박힌 뜻”**으로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와 긍휼 때문에 다른 존재(피조물)에게 그 존재를 발전시킬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피조물에게 자유로운 응답과 성장의 여지를 주시며 함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인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장 심판하거나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즉각 이루실 수도 있음에도,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스스로 변화되고 순종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한계 지움(self-limitation)**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여러 완전한 속성을 짝지어 설명하면서 특별히 인내와 지혜를 하나로 묶어 다루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랑의 경륜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예정, 자유의지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하나님의 예정론 및 인간의 자유의지 교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의가 되어 왔습니다. 우선 예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인내는 택하신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기다리시는 은혜로 이해됩니다. 로마서 9장 2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조차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을 내리실 수도 있음에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참고 견디신다는 뜻입니다. 예정 교리를 발전시킨 어거스틴이나 칼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결국 택자들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택한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충분한 시간을 주시며 인내하시고, 그들이 모두 돌아올 때 예정하신 구원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적 시각에서 하나님의 인내는 그분의 주권적 은혜의 한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도 이 인내의 기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집행된다고 강조됩니다.

이에 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신학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인내를 모든 사람을 향한 구원의 열린 초청으로 해석합니다. 알미니우스주의나 웨슬리안 전통 등에서는 베드로후서 3:9의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회개하기를 바라시기에 오래 참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내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강압적으로 누구를 구원하거나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은혜의 언약” 안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그려집니다. 한 현대 신학자는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에게 행동할 힘을 불어넣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내에 응답하도록 부름받았다”**고까지 말했는데, 이처럼 자유의지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인내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을 선택하도록 격려하고 호소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내에 응답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각자의 책무이며, 하나님은 심판의 때가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며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정론적인 시각이든 자유의지적인 시각이든 모두 하나님의 인내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인내를 택자를 위한 특정한 은혜로 더 강조하고,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인내를 모든 사람에게 열린 자비로 더 강조하지만, 두 입장 모두 하나님의 인내가 결국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임을 공통적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내 기간이 무한정 계속되지 않으며 언젠가 종말의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도 교회 전통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긍휼과 자비의 시간이지만, 그것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따른다는 균형 잡힌 이해가 교회사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4. 하나님의 인내와 인간의 신앙 생활

현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내가 주는 의미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는 것은 큰 위로와 도전을 줍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보증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기에, 우리는 비록 넘어지고 실패할 때에도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회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내는 거룩한 삶에 대한 경고와 권면이 되기도 합니다. 로마서 2: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것임을 밝히며, 우리가 만일 그 인내를 멸시하여 계속 죄 가운데 거한다면 결국 진노를 쌓는 것에 불과하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순간순간은 하나님의 인내가 베푼 은혜의 시간이므로, 이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속히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실제로 한 신학자는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내에 응답하도록 부름받았다”**고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게으름이나 방종에 빠지지 않고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고난과 연단 속에서 본받는 하나님의 인내

성도는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가운데 끝까지 참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고(히 12:2-3),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인내로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약 5:11, 계 13:10 등). 특히 야고보서 5:11은 욥의 인내를 본보기로 들며, 결국 **“주께서 이루신 목적”**은 극율과 자비로 나타났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묵상하면 현재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때를 신뢰하며 견딜 힘을 얻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더디게 느껴져도(합 2:3) 성도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농부가 귀한 열매가 익을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듯이(약 5:7), 우리도 끝까지 참고 견딜 때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갈 6:9).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내로 연단하시듯(롬 5:3-4), 우리도 고난을 통한 인내를 배우며 예수님의 성품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내는 궁극적으로 우리 믿음을 정금처럼 정화시키고(벧전 1:6-7),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 성장에서의 적용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영적 성장에서도 하나님의 인내는 중요한 원칙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성도를 오래 참으시며 천천히 빚어 가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에 대해 오래 참음으로 대해야 합니다(엡 4:2; 골 3:13).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나 실수하는 사람을 볼 때, 쉽게 정죄하고 단념하기보다 인내심을 갖고 권면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낙심한 자들을 격려하고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권면했습니다(살전 5:14). 이러한 공동체적 오래 참음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인내를 서로에게 반영하는 행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의 무한한 인내를 베푸셨기에 비로소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신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 받은 끝없는 용서와 참으심을 기억할 때 우리는 형제자매를 용납하고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내로 서로를 대할 때 시기상조의 판단이나 분열을 막을 수 있고, 결국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한편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하나님의 인내를 깊이 새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성화(聖化)는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평생에 걸친 과업인데,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우리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더딘 성장에도 낙심하기보다 인내로 협력하게 됩니다. 성도는 때로 자신의 연약함과 느린 변화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지만, 하나님이 긴 안목으로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을 알 때 좌절 대신 소망을 품고 전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인내는 전도의 동기가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기다리며 참으신다면(딤전 2:4), 우리도 주변의 영혼들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로 대하며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회심이 더딜 때조차 조급함 대신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아 끈질기게 중보하고 사랑으로 권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아 믿음과 사랑 안에서 오래 참는 삶은 개인의 영적 성장의 열매일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언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대한 깨달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게 하고,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5. 결론: 하나님의 인내의 영원성과 완성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으로서 구속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죄로 물든 세상을 향해 오래 참으심으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진행시키셨고,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인내의 절정에 이르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결코 변덕스럽거나 일시적인 대응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역사에는 궁극의 심판의 때가 정해져 있어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지만, 그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오래 참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5의 말씀대로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곧 구원”**이기에,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한 날 한 날이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회이며, 마침내 그 인내를 통해 구원받을 자들이 다 돌아올 때 하나님의 계획은 완성될 것입니다.

종말론적 완성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인내는 최종적인 목적과 실현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지금은 오래 참으심으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핑계할 수 없는 공의의 심판을, 회개한 자들에게는 풍성한 긍휼의 구원을 주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신학자의 말대로, 하나님은 현세에서 오래 참으심으로써 장차 그의 공의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 날에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기간이 끝나고, 그동안 쌓인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모두 공개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로 마련되었던 은혜의 때가 지나가면 더 이상 회개의 기회는 없겠지만, 그 심판조차도 하나님께서 충분히 기다리고 기다리신 후에야 집행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빚진 자들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그분의 인내와 자비를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의 표현으로서 역사 속에서 죄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능력이며, 종말에 이르러 그 인내의 목적이 모두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우심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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