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과(요일 3:4)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란으로 묘사됩니다(신 9:7; 수 1:18). 죄는 천사들 중 아마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루시퍼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 못한 그는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 하였고, 그것이 그의 몰락이었고 죄의 시작이었습니다(사 14:12-15). 사탄이라는 이름을 다시 갖게 된 그는 에덴 동산에 있는 인간에게 죄를 가져왔는데, 여기서 그는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는 똑같은 꼬임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그분의 명령에 대항하여 반역한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죄는 인간의 모든 세대를 걸쳐 내려왔고,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그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아담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왔고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아담을 통해 죄를 향한 성향(죄성)이 인류에게 들어 왔고 이에 인간들은 본성상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의 내적 속성은 반역의 죄에 의해 변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될 영적인 죽음과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기 보다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달된 부패는 상속 받는 죄(원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체의 특징을 물려 받는 것 같이,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물려받습니다. 다윗은 시편 51장 5절에서 타락한 인간의 죄성에 대해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죄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은 전가된 죄입니다. “전가”로 번역된 헬라어는 금융 및 법적 상황에서 사용되는데 “어떤 사람에게 속한 무언가를 다른 사람의 장부에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 물려받은 죄 때문에 여전한 죄인들이었지만 죄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주어진 후에는 법을 위반한 범죄들은 그들에게 죄책이 되었습니다(롬 5:13). 법을 어긴 범죄 사실이 인간에게 책임이 되기 이전에도 죄에 대한 궁극적 형벌(죽음)은 계속 왕 노릇 하였습니다(롬 5:14).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들은 죽음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모세의 율법(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을 범한 죄악의 행위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물려 받은 죄성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이후,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하나님의 율법들을 위반한 죄책 때문에 죽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해 전가의 원리를 사용하셨는데, 신자들의 죄를 예수님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그분이 그 죄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신 치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시키시면서,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셨고,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요일 2:2). 여기서 그리스도께 죄가 전가되었지만, 그분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죄의 형량을 담당하셨지만 결코 죄인은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순수하고 완전한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지만 인류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죄악에 대해 책임을 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책임으로 돌린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들에게 돌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셨습니다(고후 5:21).

죄의 세 번째 형태는 모든 인간에 의해 매일 범해지고 있는 개인적 죄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결백해 보이는 거짓말로부터 인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이고 사적인 죄들을 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둔 적이 없는 사람들은 물려받은 죄책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인적인 죄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죄의 영원한 형벌인 지옥과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났고, 또한 지금은 죄 짓는 것을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죄를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책망하십니다(롬 8:9-11). 우리의 사적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친교와 교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물려받은 죄, 전가된 죄책, 그리고 개인적인 죄로 인해 세 번 정죄 받습니다. 죄에 대한 공평한 대가는 오로지 죽음인데(롬 6:23), 그냥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입니다(계 20:11-15). 감사하게도, 물려받은 죄, 전가된 죄책, 그리고 개인적인 죄, 이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혔고 지금 우리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엡 1:7)을 받았습니다.

죄론이 무엇입니까?

죄론이란 죄에 대한 연구입니다. 죄론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대해 연구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표적에서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의의 표적에서 빗나갑니다(로마서 3:23). 따라서 죄론은 우리가 표적에서 빗나간 이유와 방법, 결과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죄론에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의 정의란 무엇입니까? 죄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요한일서 3:4)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신명기 9:7; 여호수아 1:18) 등으로 묘사됩니다.

우리 모두가 아담과 하와의 죄를 물려받은 것입니까? 로마서 5:12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하나님께는 모든 죄가 동일합니까? 죄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악독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죄의 대가와 구원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죄가 동일합니다. 모든 죄는 영원한 정죄로 이어질 것입니다(로마서 6:23).

어떤 것이 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 구체적으로 죄라고 선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영역에서 무엇이 죄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죄와 같은 우울한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구원받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해하기 앞서서 먼저 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론은 우리 모두가 상속, 전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라 죄인이 되었음을 설명해 줍니다. 죄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정죄하셔야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죄론은 죄에 대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죄된 본성을 이해하게 되면, 죄인을 정죄하여 의로운 심판으로 지옥에 보내시지만, 또한 의에 대한 완전한 기준을 자신의 희생으로 직접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본성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아야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론에 있어 핵심 구절은 로마서 3:23-24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원죄란 무엇인가?

‘원죄’라는 용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와 그로 인하여 나머지 인류에 끼친 영향을 다룹니다. 원죄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지니게 된 죄와 그 죄책"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교리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처지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 영향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죄를 짓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기 이전에 발생합니다. 그 영향을 다루는데 있어서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습니다.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 이 견해는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견해입니다. 단지 아담은 후손들에게 죄를 짓도록 영향을 끼친 죄악의 본보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단지 죄를 안 짓겠다고 선택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이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는 아무런 가망 없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으며 또한 그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에 ‘죽은 것’이거나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수많은 구절들과 상충됩니다(엡 2:1-2; 마15:18-19; 롬 7:23; 히 6:1, 9:14).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소위 "죄성"으로 언급되는 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고 믿습니다. 고양이가 그의 본성에 따라 ‘야옹’하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람은 그 죄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그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그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알미니안 주의에서는 그 은혜를 “선행적인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아담의 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고 단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아담과 유사한 방법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과 상충됩니다(고전 15:22; 롬 5:12-18). 또한 “선행적인 은총”에 대한 교훈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칼뱅주의(Calvinism): 칼뱅주의 교리는 아담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성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유죄 상태가 되게 만들었다고 언급합니다.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잉태됨으로 인한 결과는(시 51: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마음으로 묘사되는 사악한 본성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죄책과 형벌(죽음)은 우리에게도 속하게 되었습니다(롬 5:12, 19). 하나님 앞에서 왜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 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견해는 인류가 아담 안에 씨의 형태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했을 때,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창 14:20; 히 7:4-9), 레위도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른 견해는 아담이 우리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 역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속죄를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원죄에 대한 칼뱅주의적인 견해는 성경적 가르침과 가장 잘 일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로 선택할 때 원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그럴듯한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의식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성을 거절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죄성을 거부하는 대신에 ‘승낙’합니다. 이는 사실상 죄성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성을 승낙할 때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행동에 동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는 그 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 죄에 대해 유죄가 됩니다.

죄성이란 무엇입니까?

죄성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죄성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본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 자신의 뜻 사이에서 선택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뜻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죄성에 대한 증거는 넘칩니다. 누구도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도록 가르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행동은 자연스럽게 발현됩니다. 뉴스에는 인류의 잘못된 행동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서양의 모든 물방울에서 짠맛이 나는 것처럼, 죄도 우리의 본성의 원자 하나하나까지 다 영향을 끼친다. 너무나 슬프게도 죄성이 너무나 많기에, 죄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속고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이론적이나 실제적으로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 존재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로마서 8:3에서 “죄 있는 육신”에 대해 말합니다. 골로새서 3:5에 나오는 일련의 죄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로마서 6:6은 “죄의 몸”을 언급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진 살과 피는 우리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성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을 가지고 있고, 그 죄성은 우리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전적 타락의 교리이며, 이 교리는 성경에 충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제 길로 갔습니다(이사야 53:6).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로마서 7:14)라고 인정합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존재였습니다(로마서 7:25). 솔로몬도 똑같이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도서 7:20). 아마 사도 요한의 표현이 가장 직설적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한일서 1:8).

아이들조차도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날 때부터 번득이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절규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다른 본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편 58:3).

죄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죄성 없이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합니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죄가 인간 본성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내 수치심과 불편함에 휩싸여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습니다(창세기 3:8). 이들이 자녀를 낳았을 때 아담의 형상과 본성이 자녀에게 전해졌습니다(창세기 5:3). 죄성은 인간 계보의 초창기에 드러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첫 아이인 가인이 첫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창세기 4:8).

죄성은 대대로 온 인류에게 전해졌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이 구절은 또한 죄성이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우울한 진리를 보여줍니다(로마서 6:23, 에베소서 2:1도 참고).

죄성이 낳는 또 다른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적의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무지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7-8). 이렇게도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역사상 죄성이 없던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아담에게서 내려온 저주를 피해 세상에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의로운 이”(행 3:14)로 죄를 알지도 못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5:21).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속 제물인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베드로전서 1:19)으로 십자가 제물이 될 수 있으셨습니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은 아담의 타락의 힘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6). 우리는 아담 아래에서 태어나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물려받습니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곧바로 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죄의 오랜 본성과의 싸움이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15-25에서 자신의 외로운 싸움을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에는 지원군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각 신자 안에 거하셔서 우리가 내면의 죄성에 이끌리지 않도록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일서 3: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면할 때 이루어질 성화의 완성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3:13; 요한일서 3:2).

십자가에서의 완성된 사역을 통해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트리고 신자들이 자신들의 죄성을 이기게 해주셨습니다(베드로전서 2:24).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타락한 육체에 결박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거듭난 사람들은 이런 명령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1).

일곱 가지 대죄 (칠죄종) 란 무엇인가?

초대 기독교 교훈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일곱가지의 대죄의 목록은 기독교 신봉자들에게 죄를 지으려는 타락한 인간의 성향에 대해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유일한 죄는 계속적인 불신의 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데, 이는 불신은 용서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

치명적인 일곱 가지의 죄악에 대한 개념은 성경적입니까? 그럴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 6장 16-19절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1) 교만한 눈과

(2) 거짓된 혀와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5)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6)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7)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목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들이 아닙니다.

6 세기의 그레고리 교황에 따르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교만, 시기, 탐식, 색욕, 분노, 탐욕. 게으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죄가 부인할 수 없는 죄일지라도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라고 묘사된 적은 없습니다.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의 전통적 목록은 많은 다양한 죄들을 분류하는데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죄가 이 일곱 가지 범주 아래 분류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일곱 가지 죄가 어떤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롬 6:2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마 26:28; 행 10:43; 엡 1:7).

가장 큰 죄는 무엇입니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죄보다 더 큰 죄란 없습니다. 모든 죄는 우리와 하나님을 똑같이 분리시키며, 따라서 모든 죄는 속죄의 대상입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식의 “대죄”와 “소죄”로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죄라고 해도 범죄자에게 영적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초래한다는 점에도 다 똑같이 “대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심판의 날에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마태복음 11:22, 24; 누가복음 10:12, 14).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9:11에서 어떤 죄가 (“가장 크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죄보다 “더 크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사람이 “더 큰 죄”를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가룟 유다든 가야바든 간에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 준 사람의 죄가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을 분명한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해주는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냉혹하게 예수님을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의 죄보다 더 컸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 9:41).

그러나 이러하다고 해서 특정한 죄가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임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6:16-19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이 나옵니다.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나 일곱 가지 죄 중 어느 죄도 다른 죄보다 더 큰 죄라고 언급되지 않으며, 따라서 가장 큰 죄라고 언급되는 죄도 없습니다.

성경은 특정한 죄를 가장 큰 죄라고 부르지 않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언급합니다. 이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불신자로 죽은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요한복음 3:16) 영원한 구원의 수단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고 당신만이 하나님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수단을 거부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가장 큰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는 죄가 있나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난 사람에게 있어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믿는 자의 죄는 십자가에서 사해졌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8:1).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사역 내내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놀라우신 죄 사함을 베푸셨습니다. 삭개오 (누가복음 19장), 가나의 죄 지은 여인 (누가복음 7장), 갈릴리의 중풍병자 (누가복음 5장) 등 모두가 주님께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은 문제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1: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라는 말씀은 죗값이 완전히 치러졌다는 의미입니다. “다 이루었다”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스타이

는 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멋진 말입니다. “지불 완료”를 표시하기 위해 영수증에

테텔레스타이

라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이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풀려나면,

테텔레스타이

라고 적힌 간판을 집 문 앞에 붙여서, 그가 더 이상 사회에 빚진 것이 없음을 알렸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희생 제물이 되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14).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이미 저질렀거나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도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강조 추가). 고린도전서 6:9-10은 한 때 고린도 교인들의 특성이었던 여러 추악한 죄들의 목록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목록을 사용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끌어 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11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시편 103:12) 그들의 죄는 없어졌고, 그들에게서 멀리 옮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 조건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사도행전 10:43). 하지만 주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도 죄의 감면도 없습니다 (요한일서 5:12).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36).

요한은 거듭 난 신앙인들을 위해 자신의 첫 번째 서간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포함시켰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우리는 모두 죄를 짓습니다 (요한일서 1:8).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의 자녀들을 용서하고,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준비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1:9의 첫 부분에 나오는

만일

이라는 단어는 만일 우리가 “자백하면”이라는 조건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호모로지아

(문자 그대로 “같은 단어”를 의미)이며, “같은 것을 말하다”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죄 사함은 우리가 계속 죄를 지을 수 있도록 백지 위임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6:1-2).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행하는 거듭난 신앙인은 오히려 죄에 대해 민감해질 것이고, 주님께 속히 죄를 자백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진리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값 없이 죄를 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꺼이 용서하시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로마서 5:20). 사도 바울은 구원 받기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디모데전서 1:13)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에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실 수 있다면,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_____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용서하실까요?

_____에 당신이 지었던 아무 죄라도 대입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속죄 교리는 구원과 죄 사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을 겸손히 간구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셨습니다 (이사야 53:5-6, 고린도후서 5:2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지불하셨고, 믿는 자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완전히 사함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거룩함을 위해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매일의 죄 사함 또한 있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예수님을 죽인 죄와 비교했을 때는 미미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과 용서의 개념들은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위의 공백 안에 대입한 죄가 어떠한 것이든 그 모든 죄를 사하기에 충분합니다. 죄 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것이 우선 문제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 (죄 사함)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만일 “네”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모든 죄의 빚을 완전히 사함 받습니다 (사도행전 13:38-39). 이 죄 사함은 행실이나 선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3:20, 22). 구원은 우리가 스스로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결코 선해질 수 없다는 것과 그래서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이제까지 저질러진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과 모든 죄를 덮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그래서,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모든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끗하게 하시고, 교제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1:8-9). 죄 사함을 받아도, 여전히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자책감은 우리 양심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죄 된 행동 양식을 반복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죄가 많아도 완전히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의 소망입니다. 죄 사함에 대해 아는 것은 죄책감에 대한 치유책이 됩니다.

죄 사함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정말로 아름답고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를 알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용서받기에 얼마나 끔찍하고 가치 없는 존재인지를 깊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과 긍휼이 많으시며, 우리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심이 분명해집니다. 죄 사함 구하는 것을 막는 우리의 죄 된 오만함은 우리와 돌보시는 구원자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구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충분하시며, 용서하기를 열렬히 바라시며, 죄로부터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찬양과 함께 궁극적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0:4).

자위행위, 성경에 따르면 죄인가?

성경은 자위행위에 대해 명쾌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습니다. 자위행위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38장 9-10절에 나와 있는 오난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땅에 설정한 것”이 죄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자위행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난이 “땅에 설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형제를 위해 상속자를 제공하는 의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를 벌하셨던 것입니다. 자위행위가 죄가 된다는 증거로 가끔 사용되는 두 번째 구절은 마태복음 5장 27-30절입니다. 예수님은 음란한 생각들에 대해 반대하시면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과 자위행위 사이에 유사점은 있지만, 예수님이 자위행위에 대해 언급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자위행위는 죄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지만, 자위행위로 이끄는 것들이 죄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위행위는 대부분 음란한 생각들, 성적인 자극 또는 도색적인 이미지들의 결과입니다. 이 부분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만일 정욕, 부도덕한 생각들 그리고 외설의 죄를 버리고 극복한다면 자위행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위행위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갈등하지만, 실제로는 자위행위로 이끄는 것들이 훨씬 더 회개해야 할 대상입니다.

자위행위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인 원리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선언합니다. 자위행위가 이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칩니다. 만일 당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이 구속되었고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들에 비춰볼 때, 자위행위가 죄라는 것은 성경적인 결론입니다. 분명히 자위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자위행위는 부도덕한 모습을 피하지 못하며 우리 몸의 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도 못합니다.

성경은 포르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용어는 포르노와 관계가 있습니다. 포르노는 오늘날 이 세상에 만연해 있습니다. 아마 다른 어떤 것보다 사탄은 성을 뒤틀리게 하고 왜곡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탄은 선하고 올바른 것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스러운 성관계)을 취하여 정욕, 포르노, 간음, 강간, 그리고 동성애로 대체시켰습니다. 포르노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사악함과 부도덕함으로 향하는, 매우 미끄러운 비탈 면 위에 내딛는 첫 발자국이 될 수 있습니다(롬 6:19). 포르노의 중독성은 잘 입증되어 있습니다. 마약 사용자가 똑 같은 ‘흥분’를 얻기 위해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마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포르노도 사람을 심한 성중독과 죄악된 욕망으로 더 깊이 끌고 갑니다.

죄의 세가지 주요 범주는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포르노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의 정욕을 일으키고, 그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안목의 정욕입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 비추어 보면, 포르노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포르노는 중독적이고 (고전 6:12; 벧후 2:19), 파괴적입니다 (잠 6:25-28; 겔 20:30; 엡 4:19). 포르노의 본질인,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욕정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마 5:28). 포르노에 습관적으로 열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특징짓고, 만일 그가 도움을 구하지 않고 죄에 계속 거하고, 멈추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행동을 바꾸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면 이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고전 6:9).

포르노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주실 수 있고 또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포르노에 관련되어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합니까? 여기에 승리를 위한 몇 가지 단계들이 있습니다.

(1)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요일 1:9).

(2)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고 또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하십시오(롬 12:2).

(3) 당신의 마음이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할 만 하고, 칭찬할 만 한 것들로(빌 4:8) 채워지기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4) 거룩함으로 당신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을 배우십시오(살전 4:3-4).

(5) 성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고 필요할 때는 배우자만 의지하십시오(고전 7:1-5).

(6) 당신이 성령과 함께 동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갈 5:16).

(7) 당신이 포르노 이미지를 접하지 않도록 현실적인 단계들을 취하십시오. 당신의 컴퓨터에 포르노 차단 막을 설치하고, 텔레비전과 비디오의사용을 제한하며, 당신을 위해 기도해 주고 당신이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다른 기독교인을 찾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술취함과 남의 아내를 탐하는 우상 숭배의 우를 범했습니다. 

저는 선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길을 걷고싶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저의 마음을 정결케 해주시옵고 새롭게 해주시옵고 변화를 촉구하옵나이다. 

내 마음이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 받을 만 하고 칭찬 받을 만한 것으로 채워지기를 간구합니다. 

거룩이 내 모든 영 혼 육을 소유하도록 ㅐ주시옵소서.

또한 배우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점지해주신 배우자를 빨리 주시길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 하고 동행하면 내 육체의 소욕은 주님께서 이루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속히 알게 하소서.

그 어떤 정욕도 탐심도 육체의 일도 나를 내 영혼을 더럽히지 않도록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마귀여 물럿거라!

화인 맞은 양심을 가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성경 디모데전서 4:2은 화인 맞은 양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넣어주신 도덕적 자각입니다 (로마서 2:15). 양심이 “화인 맞으면” – 문자 그대로는 “마비되면” – 둔감해집니다. 그러한 양심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영적인 흉터 조직”이 옳고 그름에 대해 감각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화인으로 상처 입은 동물 가죽이 더 큰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도덕적 고통에 둔감해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1-2에서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자들에 대해 알려줍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이 단락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거짓 교사들은 “귀신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때문에, 마귀의 대변자입니다.
  2. 거짓 교사들은 거룩함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거짓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위선적인 거짓말쟁이입니다.
  3. 거짓 교사들의 양심은 화인 맞았기 때문에, 부도덕합니다. 이는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줍니다. 거짓 교사들은 어떻게 수치심 없이 거짓말을 하고, 죄책감없이 기만을 퍼뜨릴까요? 바로 화인 맞은 양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느낌을 무시합니다.

편지 앞부분에서, 바울은 화인 맞은 양심과 반대되는 “선한 양심”에 대해,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과 사랑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온다고 이야기합니다 (디모데전서 1:4-5). 선한 양심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죄책감에 매이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순전함을 유지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 (요한일서 1:7)와 교제하는 것을 즐깁니다. 마귀의 거짓말은 선한 양심을 가진 자가 절대 좋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변절자의 거짓말에 따르는 대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킬 것]” (디모데전서 1:18-19)입니다.

잠언 6:27은 간음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 수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느냐]?” 거짓 가르침과 관련된 이 질문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절자가 양심에 화인 맞지 않고서야 불 같은 지옥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도덕적 자각입니다. 
내 양심을 화인 맞지 않고 영의 사람으로 민감하게 하소서.
큰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지지 않고 새 사람으로 또한 거듭나서 내 마음을 새롭게 하시옵소서.
내가 거짓교사와같은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간구합니다.
내가 영광의 탈을 쓰고 마귀를 대변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함의 가면을 쓰고도 거짓으로 가득 차있어서 위선적인 거짓말 쟁이가 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부도덕하지 않도록 하소서. 수치심 없이 거짓말하고 기만하고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지지 않도록 거짓말 하지 않도록 제게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릇된 것을 바로 잡아 이야기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시고 죄책감에 매이지 않게 하시옵소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순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선한것을 즐기고 빛과 함께 교제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킬 것을 소망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느냐 
변절자ㅏ 양심에 화인 맞지 않고서야 불 같은 지옥의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항상 내 믿음을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주님의 성실한 청지기로 사용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죄의 결과로 고통받아야 하나요?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만 (에베소서 1:7), 우리는 아직도 많은 방식으로 죄의 결과를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마약 밀매자는 감옥에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가 다음 날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과거의 죄로 인한 결과를 겪게 될 것입니다. 간음을 저지른 거듭난 크리스천은 가족과 직업 등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그만둔 이후에도, 죄의 결과는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죄의 일시적인 효과를 없애주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죄의 영원한 결과를 마주하지 않을 것을 보장해 줍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로마서 6:23).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셨던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21).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기반으로 믿는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로마서 8:1).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가 죄에 대한 결과를 경험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정죄나 (로마서 8:1), 노하심 (데살로니가전서 5:90), 또는 징벌 (데살로니가후서 1:8)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로마서 6:15). 예수님께서는 직접 하나님의 노하심을 감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10). 믿는 자들이 여전히 경험하는 죄의 결과는 다음 중 하나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결과.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죄의 결과를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정원에 자라나는 잡초를 가지고 있고, 자연 재해를 만나며, 병들고 늙어가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로마서 5:12). 죄 된 세상에 사는 죄인들로서, 원죄의 이러한 결과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업자득.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죄의 결과는 죄인이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상관없이, 이미 내재되어 있고 사실상 정해진 것입니다. 성경은 성적 부도덕이 자기 자신의 신체에 짓는 죄라고 경고합니다 (고린도전서 6:18).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습니까]” (잠언 6:27). 무언가를 절도하면, 붙잡힐 것과 절도 죄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붙잡혔을 때 체포에 저항한다면, 더 많은 결과를 쌓게 됩니다. 즉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교훈적인 결과.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의 흉악한 본질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것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어떤 죄의 결과를 우리 삶 속에 남겨 놓으신 듯합니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하셨던 만큼 충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감히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죄의 결과에 직면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겸비하고, 더욱 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33 참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들의 죄로 인해 징계를 받았을 때, 그것은 교회에 교훈이 되었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사도행전 5:11). 고린도전서 5:5 과 디모데전서 1:20도 참조.

징계의 결과. 죄의 결과 중 일부는 아버지가 그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의 결과입니다. 죄에 대한 처벌과 죄에 대한 징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다시 인도하기 위해 계획된 징계를 경험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히브리서 12:5-6, 잠언 3:11-12과 비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징계를 겪는지 보십시오. “아들마다 (누구나)” (히브리서 12:8) 겪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버릇없이 굽니다.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징계적 결과를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이자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10).

고린도 교회는 죄에 대한 징계적 결과에 직면한 크리스천들의 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않은 태도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전서 11:30). 우리는 사무엘하 12장에서도 비슷한 징계가 내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죄를 자백하고 사함 받은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가정에 특정한 죄의 결과를 허락하셨습니다 (11-14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죄에 대한 어떤 일시적인 결과를 겪게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옆길로 새는 당신의 자녀들을 전혀 징계하지 않으신다면, 좋은 아버지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혀 징계받지 않거나 혹은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그 결과에 전혀 고통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잘못을 통해 옳은 것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실수로부터 더 잘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죄의 일시적인 결과를 겪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에 대한 영원한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 번째 죽음, 불의 못 (요한계시록 20:14)을 절대 겪지 않도록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의 저주와 결과가 언젠가 완전히 제거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예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 (이사야 11:9)입니다.

정욕이란 무엇인가요? 정욕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정욕(lust)의 사전적 의미는 “

  1. 강렬하거나 억제되지 않는 성적 열망, 또는
  2. 압도적인 욕망이나 열망”입니다. 성경은 몇 가지 방식으로 정욕에 대해 언급합니다. 출애굽기 20:14, 17,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또는 마태복음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리고 욥기 31:11-12,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채 뽑기를 바라노라”가 그 예들입니다.

정욕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중점을 두며, 종종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불건전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정욕은 소유와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 믿음은 겸손에 대한 것이고, 거룩한 삶으로 규정됩니다 (로마서 6:19, 12:1-2, 고린도전서 1:2, 30, 6:19-20, 에베소서 1:4, 4:24, 골로새서 3:12, 데살로니가전서 4:3-8, 5:23, 디모데후서 1:9, 히브리서 12:14, 베드로전서 1:15-16). 그리스도를 믿는 각 사람의 목적은 날마다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다스려지던 옛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성경에 나온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욕은 이 이상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는 완전하거나 무결해질 수 없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분투해 나가야 할 목적입니다.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4:7-8에서 이와 관련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만일 정욕이 아직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지 않았다면, 정욕의 유혹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흠 없이 사는 삶을 통해 스스로를 채비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현재 정욕과 싸우고 있다면, 지금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삶에 거룩함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의 목록이 나옵니까?

우리는 체크리스트만 따라가면 인생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쇼핑 목록, 할 일 목록, 위시리스트 등이 그런 목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신다면 분명 성경에 피해야 할 죄의 목록을 주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죄의 목록이 있지만, 동시에 그 죄의 목록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있던 아담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2:16-17).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들에게 당신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7)은 율법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와 신명기는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줍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토라(모세오경)에 613개의 율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중 365개는 “하지 말지니라” 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죄의 예를 들자면 무엇이 있습니까? 십계명에서는 잘못된 예배,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 안식일을 어기는 것,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중상, 탐욕 등의 목록이 있습니다. 산상수훈(마태복음 5-7 장)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죄의 일부를 들어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살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 간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렇게 짧은 목록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평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다양한 죄의 목록과 더불어서, 요한일서 5:17은 우리에게 “모든 불의가 죄”라고 말해줍니다. 성경에는 하면 안되는 일들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17은 우리에게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말해줍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목록을 만들려고 하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실패와 죄책감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이 말은 괴로운 말처럼 들릴 수 있으나 사실은 최고의 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또 다른 해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해답은 몇 절 뒤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13-14). 하나님의 율법, 즉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죄의 목록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우리를 인도하는 초등 교사 역할을 합니다(갈라디아서 3:24).

정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성경은 거짓말이 옳은 일로 여겨지는 사례를 어디에서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언을 금합니다(출애굽기 20:16). 잠언 6:16-19에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 주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곱 가지 목록에 각각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린도전서 13:6). 거짓말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119:29, 163; 120:2; 잠언 12:22; 13:5; 에베소서 4:25; 골로새서 3:9; 요한계시록 21:8. 성경에는 창세기 27장의 야곱의 속임수부터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속임수에 이르기까지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거짓이 비참함과 상실감 그리고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짓말이 좋은 결과를 낳은 사례가 성경에는 최소 두 번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 왕에게 한 거짓말은 산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불러온 것으로 보이며(출애굽기 1:15-21), 아마 그 거짓말 덕에 많은 히브리 아기들이 생명을 구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여호수아 2:5에서 이스라엘 정탐꾼을 보호하려는 라합의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거짓말조차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짓말이 이렇게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어디에서도 거짓말 자체를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정당한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짓말이 허용되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도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문이 남습니다. 거짓말이 정당할 때가 있습니까? 이 딜레마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예는 나치가 점령했던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이라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은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에 숨겨줍니다. 나치 군인들이 그녀의 집에 와서 유대인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실을 말하고 자신이 보호하려 했던 유대인들이 나치에 잡혀가게 허용해야합니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경우에, 즉 거짓말이 끔찍한 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경우에는 거짓말이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히브리 산파와 라합의 거짓말과 어느 정도는 비슷할 것입니다. 악한 세상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훨씬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덜 악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이 정당한 경우를 맞이한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의 위험/결과는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1:9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을 썼으며, 이 말의 핵심은 만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우리가 고백할 때 그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십니다. 고백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죄의 악랄함에 대해 하나님과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 즉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이러한 고백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고백한 죄도 없고 따라서 용서받은 죄도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1:8-9; 요한복음 3:15-18).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값이 지불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거룩한 교환(divine exchange)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디도서 3:5). 예수님은 우리와 자리를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장부가 예수님의 완전한 장부와 교환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승인과 수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완전한 장부를 받은 이후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추운 겨울날 남쪽 창가에 서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공기는 차갑지만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햇볕은 따뜻하고 여러분은 그 빛을 즐깁니다. 그때 여러분이 커튼을 칩니다. 온기가 곧바로 사라집니다. 태양이 빛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과 태양 사이에 장애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커튼을 열면 다시 따뜻한 태양볕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당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장애물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 있습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그러한 커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기뻐하십니다(시편 37:23; 로마서 8:38-39).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와 교제하며, 우리를 인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시편 84:11; 115:13; 사무엘상 2:30).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를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선택해서 우리 자신과 거룩하신 아버지 사이에 장애물을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커튼이 쳐지고 차가운 영적 외로움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울분에 찬 비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회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랑의 아버지에게서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12:7-11). 주님의 징계는 혹독할 수 있으며, 만약 마음이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면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1:30; 요한일서 5:16).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이사야 65:2; 66:13; 마태복음 23:37; 요엘 2:12-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추적하시고, 징계하시며,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로마서 5:8).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는 손대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고백과 회개로 커튼을 걷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죄 속에 남는 것을 택한다면 그 선택에 따른 결과도 택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교제가 깨지는 것과 성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고린도후서 13:5).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회개 없는 죄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합니다(요한일서 2:3-6; 3:7-10). 거룩함을 열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2:37-38).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요한일서 14:15). 고백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죄를 고백하고 죄를 버림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블로그 이미지

잉비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