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생각이 냐면은

예수 어차피 그럼 믿을 거면은 죽기 전에 그러면은 죄 사한다고 하는데

그럼 모든 죄를 다 지고 100살 전에 더 믿고 죽음 되는 게 아니냐

난 오만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죄를 씻는다는 거를 그렇게 엄청난 가볍게 생각하고

굉장히 오만 하고 멍청한 그 만한 생각이 없고

내가 이 작은 그 가시도 모서리 치게 몸 떨면서

저에 대해서 이렇게 회개 하는데

그 많은 죄를 90 년치 100 년치 죄를 한방에 회개 한다는 건

인간으로써 그게 할 수 없고 그 결과 과연 그걸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절망 하는 것은 아닌가

뭐 이런 오만한 생각했던 저 자신도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항상 저의 교만함과 오만함을 가져가시고 항상 회개 하는 자리에서

주님의 절대적인 지존자의 자리에서

항상 주님의 뜻을 주님 원대로 하시기를 항상 소망 하고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교만한 생각

내 마음대로 살고자하는 교만한 생각

교만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병

내가 어릴 적 철이 없을 때 가졌던 신앙은 반쪽짜리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 신앙의 흠모 대상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예수님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였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서 모든 예수 믿는 어른들은 ‘하면 안 되는 것들’을 감시하는 감시자였다.

‘술 마시면 안 되는 것 알지?

담배 피우면 안 되는 것도 알지?

함부로 연애하면 안 되는 것은 물론 알고 있겠지?’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예수 믿게 된 것이 내 삶에 큰 족쇄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런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다가 죽기 5분 전에 예수 믿고 천당 갔으니, 그땐 그 인생이 너무 부러워 보였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반항심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것을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내 평생에 술과 담배를 입에 대 보지 않은 것이 나에게 큰 복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크리스천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이 예수님 우편에 있던 강도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예수님 우편에 있던 강도가 왜 가장 불행한 크리스천인가?

청소년 시절의 나는 열등감이 많았고 나 스스로를 초라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살았다. 우울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어느 날 보니 매우 밝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가 나를 괴롭혀도 ‘허허’ 웃으며 용서하고 용납하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나도 힘들고 상대방도 힘든 인생을 살았는데, 자격 없는 나를 대속해주신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그 감격에 기뻐하다 보니 나도 기쁘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도 기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런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예수님을 믿자마자 십자가 옆에서 죽고 말았으니, 그 강도는 불행하고 안타까운 크리스천이 아니겠는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의 삶도 기쁘고 즐거워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릴 겨를 없이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맺게 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 간격이 너무 커서 인간이 만든 사다리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버렸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벌어진 이 간격 때문에 우리 안에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이 뻥 뚫린 구멍 사이로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이런 치명적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어놓으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대안,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뻥 뚫린 구멍이 메워졌다.

중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샬롬’은 진짜 ‘샬롬’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결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왕자님을 만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게 진짜 동화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하나님은 그저 기계적으로 이신칭의의 ‘구원표’를 나눠주시고는 천국 갈 때 꼭 제출해야 한다며 장롱에 넣어두도록 하시지 않았다.

우리 삶 가운데 늘 대속의 기쁨이 넘쳐서 우울하다가도 금방 내 안에 부어주시는 신령한 새 노래로 인해 언제 우울했냐는 듯 누리고 즐기며 사는 삶을 맛보게 되길 바란다.

  • 오늘, 새롭게 살 수 있는 이유,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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