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믿음을 요구하시나요?
하나님은 왜 믿음을 요구하시나요? 질문 하나님은 왜 믿음을 요구하시나요? 답변 모든 관계들이 믿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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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질문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답변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1-2).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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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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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믿음을 요구하시나요?
모든 관계들이 믿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겪는 모든 것을 똑같이 겪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어떠한지 알기 위해 그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잠언 14:10은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마음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17:9은 인간의 마음이 사악하고 거짓된 것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간의 마음은 그 주인에게조차 그 속이 얼마나 사악하고 기만적인지 감추려 하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을 전가하고,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축소시키는 등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해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의 믿음 (신뢰)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남편이 겨울 도로에서 그녀가 평소 하는 것보다 더 빨리 운전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안전하게 운전해 줄 것을 신뢰하면서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탑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자신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과 함께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나누며, 그들이 그 지식을 가지고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이 도로 규칙을 따를 것을 신뢰하면서 길을 운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과의 관계든, 친한 친구 및 동료의 관계든,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관계에 있어 신뢰는 항상 필수적인 구성 요소가 됩니다.
우리가 동료인 유한한 인간 존재도 완전히 알 수 없을진대,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드러내시고 싶어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을 (무한한 양처럼 보이는) 1리터 남짓한 병 (유한한)에 부으려는 것처럼…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과 그들의 성격에 대해 알아감으로써 신뢰를 쌓아가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창조물 (로마서 1:18-21)과 기록된 말씀, 성경을 통해서 (디모데후서 3:16-17; 베드로후서 1:16-21),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요한복음 14:9) 당신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보여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과 죄값에 대한 지불로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장벽이 제거될 경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빛과 어둠이 함께 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과 그 죄값이 지불되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함께 교제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수적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12; 고린도후서 5:21; 베드로후서 3:18; 로마서3:10-26).
과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좀더 “분명히” 드러내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이 기꺼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 생활에서 풀어줄 때까지 기적적인 재앙들을 내리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계심을 보여주신 경우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여시고 대략 20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 위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바다가 열린 틈을 타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아 오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로 뒤덮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4:22-29).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을 기적적으로 먹이시고,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뚜렷한 증표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5:14-15).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인도하심, 그리고 능력의 거듭되는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려 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대신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과 그 땅에 사는 거인처럼 키가 큰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들에게 겁을 주었던 열 사람의 말을 믿기로 선택했습니다 (민수기 13:26-33).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주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에 더 이상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을 시사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소통하신다 해도, 우리의 죄 가득한 마음이 그들의 것과 동일하므로, 우리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별로 다르지 않게 반응할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서부터 1,000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실 미래의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 20:1-10).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공의와 의로 다스리실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완전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1,000년이 찬 후에는 사탄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적하는 반군을 일으키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천년의 미래 사건과 과거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불충분하게 계시하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에 반항하는 죄 많은 사람의 마음이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빠져 스스로 통치하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당신의 본성을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사건들과 자연의 섭리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당신이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며, 온전히 거룩하시며,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하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든지 안 하든지 그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드러내신 것과 하나님의 틀림 없는 말씀, 성경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통해 알게 되는 것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기반하여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직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다면, 성경을 세심하게 공부해 보시길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에도 그리고 언제가 천국에서도 더욱 충만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 달콤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요?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1-2). 광야에서의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을 꾀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사탄에게 충성하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6:21-23에서도 비슷한 시험을 봅니다. 거기서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당신께 맡겨진 십자가 운명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누가복음 4:13은 광야에서의 시험 이후 사탄이 “얼마 동안 떠”났다고 말해 줍니다. 이후 사건들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예수님이 사탄에 의해 더 시험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점은 다양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하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 “광야에서 …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는 구절을 통해 명확해집니다. 한 가지 목적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 우리가 시험 당하는 모든 측면에서 똑같이 시험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병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 주님은 인간적 본성을 가지시고 우리와 같은 연약함에 시달려보셨기에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2:18). “시험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기서 “시험대에 올리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상황으로 인해 시험대에 올려지고 시련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같은 시련을 겪으신 자로서 이해해 주시고 동정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세 가지 패턴을 따릅니다. 첫 번째 시험은 온갖 종류의 육체적 욕망들을 포함하는 육신의 정욕과 관련됩니다 (마태복음 4:3-4). 우리 주님은 주리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바꾸어 보라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명기 8:3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이생의 자랑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5-7). 마귀는 여기서 성경 구절 (시편 91:11-12)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대적하려 시도하지만, 주님은 다시 그에 반대되는 성경 말씀 (신명기 6:16)을 들어 당신의 능력을 남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세 번째 시험은 안목의 정욕과 관련된 것으로 (마태복음 4:8-10) 만일 예수님이 본래 오신 이유인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우회하여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길이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세상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에베소서 2:2),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충성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주님의 거룩한 본성이 몸서리쳐질 일인데 주님은 날카롭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4:10; 신명기 6:13).
육신이 본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빠지게 되는 많은 시험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우리는 그러므로 승리할 수 있고 시험으로부터 해방된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체험하신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효과적으로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흔한 시험을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나아가 우리는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성경을 가지고 우리가 정확히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마귀의 권세는 무수한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 오지만, 모든 시험은 그 중심에 동일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이 그것입니다 (요한1서 2:16). 우리는 오직 마음과 정신을 진리로 채움으로써 이러한 시험을 인식하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크리스천 용사의 갑옷은 오직 하나의 공격 무기,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에베소서 6:17)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친밀하게 알면 우리의 손에 칼이 쥐어지고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된 이래로(눅 1:26-38),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제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약혼자였던 요셉이 임신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마 1:18-24). 요셉은 마리아가 가진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사로부터 확인한 후에야 그녀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천사가 요셉에게 말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천사는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이 말은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아기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마 16:13; 막 8:27). 그 대답은 오늘날과 같이 다양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더 자세히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베드로가 올바른 답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사실이라고 확증하시고 그 진리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본성과 정체성에는 영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에 관한 바른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10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질에 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요 1:1-14 참조). 빌립보서 2:6-7에서는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9에서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시며,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2:14-18; 4:15).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죄성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에게 전해졌습니다(롬 5:12).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신성한 본성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요 8:29; 히 9:14).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300개 이상의 예언을 성취해야 했습니다(마 4:13-14; 눅 22:37; 사 53; 미 5:2).
인간이 타락한 후(창 3:21-23), 인간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무고한 제물의 피가 필요했습니다(레 9:2; 민 28:19; 신 15:21; 히 9:22).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만족시킨 최종적이고 완전한 제물이었습니다(히 10:14).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적합했으며 예수님의 몸을 통해 그 구속 사업에 필요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그런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마 26:28; 요일 2:2).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예수님이 단지 선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에게도 죄의 본성이 있고 완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누군가를 구원할 능력이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셨고 그로 인해 예수님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과 무덤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요1:12; 고전 15:3-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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