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과 불경

기독교와 불교, 비교하며 살펴보기 ?

임헌준 목사

온양 기장 예은교회, 신학박사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것은 비단 성경에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여러 사상들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이 행한 삶의 궤적에 따라 선악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악을 전혀 행치 아니하고 선하게만 살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선하게 살고 싶어하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서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말씀한다(전 7:20).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완전한 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고 현실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스러운 형벌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 역사이래 많은 종교들이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길과 불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해탈 성불의 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기독교의 구원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한다(롬 3:23).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레미야 2장 22절에서는 말씀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누구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사 53:5-6; 고전 15:3).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리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롬 3:24).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내 마음에 믿고 고백할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 10:1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선물도 주시고(요 3:16), 또한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며(롬 8:16; 갈 4:6),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 가운데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산을 오르다보면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한 갈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가 있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길도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기독교 밖의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도 그 나름의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에 구원이 이 땅에서의 행복, 기쁨, 소망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이 땅의 차원을 넘어 영원한 시간 속에서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써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사람이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불교에 비해 배타적이고 독선이 강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1. 불교의 해탈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선악간 행위에 따라 윤회하는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끝없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길을 불교에서 ‘해탈(解脫)’ 혹은 ‘성불(成佛)’이라고 하는데,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해탈’이라고 하고,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된다는 의미에서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서 불교에서 추구하고 있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의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싣닷타는 사람이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루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의 수행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실천 덕목을 말한다. 보시(布施, 베푸는 것), 지계(持戒, 계율을 잘 지키는 것), 인욕(忍辱, 어려움을 참는 것), 정진(精進,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선정(禪定,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 지혜(智慧,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 보살이 이를 잘 수행하면 성불하게 된다고 한다. 한편,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그 이름이 잘 알려진 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수행법으로 환희지(歡喜地)에서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는 십지(十地) 수행법을 말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율종에서는 계율을 강조하고, 선종에서는 참선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토종에서는 염불을 강조하고, 밀교종파에서는 진언을 강조한다.

이처럼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해탈 성불의 길이 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해탈 성불의 길은 누구나 원한다고 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길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수행자가 혼신의 정열과 노력을 쏟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취하는 해탈 성불의 방법은 세속적인 삶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출가 승려가 되어 전문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가 승려가 되어 수행한다고 해서 해탈 성불의 길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사십이장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리심을 냈을지라도 닦음도 없고(無修) 증함도 없는(無證) 경지에 이르기는 참으로 어렵다.”

  1. 나오는 말

불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의 길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만 열린다.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신자에게는 이 생에서 부처가 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만 현생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하게 살고, 그 과보로 내생에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희망사항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행 2:21).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지 못한 불교신자는 생의 마지막 길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극락에 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업보윤회의 굴레 속에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막막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소망, 참된 평화와 안식이 함께 한다(마 11:28; 요 3:16).

출처 :

크리스챤월드리뷰(http://www.christianw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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